국제 복장학원 안에 설치 취업 모델을 양성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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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차밍 스쿨이 생긴 것은 63년 한일 친선을 위한 한국 패션쇼를 치르고 난 이듬해 봄이었다.
앞서 한일친선 패션쇼를 다르면서도 언급 했듯이 한국 패션계가 커가려면 디자이너 교육 못지않게 패션모델 양성도 필요하다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다.
돌이켜 보자면 1955년 옛「여원」지로부터 한국 최초의 모드란을 부탁받아 패션 사진을 57넌 때로부터 57년 첫번째 패션쇼로 시작해서 해마다 한 두차례 이상씩 발표회를 가져오면서 매번 절실히 느끼는 것은 역시 전문적인 교육을 받은 패션 모델이 있어야겠다는 사실이었다.
그때까지 항용 해오던 대로 영화배우나 미스코리아·인기가수 등을 계속 모델로 쓰는 것은 본 궤도에 오른 우리 복식업계의 올바른 발전을 위해서 재고할 여지가 너무나 많았다.
아무리 용모나 체격이 뛰어나고 연기나 노래에서는 실력을 인정 받는 스타라 해도 패션 모델로서는 아마추어이기 때문에 패션쇼 무대에 세우기 위해서 기초를 가르치는 일반도 대단한 시간과 에너지가 소모되었다.
여성의 의적인 미처럼 쓰러지기 쉬운 것이 없고 대중적인 인기처럼 부심이 심한 것은 없다. 따라서 발표회 때마다 혹은 패션 화보 촬영 때마다 매번 새로운 미인,새로운 스타가 등장하게 마련이니 번번이 무대에서의 걸음걸이부터 가르쳐야 했다.
비단 스테이지 워킹 뿐 아니라『무대에 나가면 어디까지 똑바로 걸어갔다가 왼쪽으로 돌아서서 일단 포즈를 취한 다음 다시 걸으면서 의에 걸친 옷을 벗어 돌고 다시 한번 포즈를 취했다가 오른쪽으로 돌아 퇴장하라』는 식으로 무대 위에서의 일거수 일투족을 디자이너 자신이 일일이 지도해야만 했다.
요즈음 차밍스쿨에서 전문 과정을 밟은 직업 모델들은 어떤 옷에는 어떤 구두나 백이 필요하다든가, 이런 옷에는 이런 목걸이 혹은 이런 스카프가 잘 어울린다는 따위를 재빨리 캐치해서 센스있게 스스로 준비를 갖출줄 안다.
그러나 60년대 초반 당시만해도 모델 한 사람 한 사람이 의상을 바꿔 입을 때마다 매번 구두나 백, 벨트와 모자 등 액세서리 일체를 빠짐없이 챙겨줘야만 했으니 패션쇼 한번 치를 때마다 디자이너들은 하나뿐인 옷을 둘,셋으로 나눌 만금 바쁘고 신경이 쓰였다.
이 처럼 애써 가르쳐서 무대에 세워도 오랜 시간을 들여 몸에 익숙하도록 배운 것이 아니기 때문에 걸음 걸이나 포즈가 어딘가 서투르고 지나치게 긴장해서 실수하는 이들도 러러 있었다.
무대에 입고 나갈 의상들이 잔뜩 쌓인 준비실에서 차나 음료수를 마시다가 의상에다 엎지르는 일도 간혹 있어 한번 발표회를 위해 몇 달씩 애쓴 디자이너를 난처하게 하는 경우도 없지 않았다.
이처럼 신경전을 치르면서 발표회를 거듭할수록 직업 패션모델을 양성해야겠다는 생각이 절실해 졌는데 한일친선 패션쇼에서 일본의 직업 패션 모델들의 활동을 보고 나자 차밍스쿨 개선을 서두르게 된 것이다.
그래서 국제 복장학원 안에 차밍과를 두고 워킹 매너· 화장술· 미용체조 등을 가르쳤다.
차밍과 졸업생으로는 l회로서 일급 모델로 이름을 떨친 조혜난·한성희· 송영심· 김혜난 등을 위시해 수많은 패션모델·CF모델·TV탤런트·영화배우· 미스코리아 들이 있다.
차밍과에 오는 학생 중에는 반드시 패션모델이나 특정 직업에 진출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스스로 매력 있는 여성이 되기 위해 교양으로서 배우기 위해 오는 사람도 더러 있다.
그러나 본래와 개설목적은 어디까지나 패션계에 종사할 직업 모델을 키워내는데 있으므로 모델 지망생들의 보다 활발한 진출을 위해 아직까지 패션쇼 무대에 인기 연예인을 세우는 일부 디자이너 들이나 섬유업체의 보다 깊은 배려를 기대하게 된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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