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 해병 장교의 신미양요참전수기 입수|선봉중대장「밀턴」대위가 아내에게 보낸 서간문 3편 단국대 김원모의 교수|육상포격유도, 상륙 구실 만들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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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내년으로 맞는 한미수교(수교) 1백주년을 앞두고 지금으로부터 1백10년 전인 신미양요당시, 한 미국장교의 참전수기가 발견돼 학계에 큰 관심을 모으고 있다. 28일 김원모 교수 (단국대·역사학)는 미 해군성에서 발행된 한국관계자료 가운데에서 신미양요 당시 미 상륙군부대의 해병중대장이었던 「맥레인·밀턴」대위가 자기아내에게 보내는 서간문 형식의 참전수기 3편을 발견하고 이를 공개했다.
신미양요는 1871년 6월10일,「로저스」제독이 이끄는 미국의 막강한 아시아함대가 통상을 요구하며 강화도 내침을 강행함으로써 한미간에 역사상 최초의 무력충돌을 빚은 사건이었다. 당시 이곳을 지키던 어재연 장군 부대와 격전, 어장군 이하 3백50명의 조선 군이 전사한 반면 미군의 사망자수는 3명이었다.
이번에 발견된 「밀턴」대위의 참전수기는 신미양요에 관한 가장 직접적인 사료로서 조선 측 기록의 빈약함을 보강해줌은 물론 당시 미국이 조선을 보는 시각과 양측의 전투장면을 생생하게 제시해 줌으로써 한미관계사 연구에 큰 수확을 거두게되었다고 김 교수는 밝혔다.
「밀턴」대위는 당시 강화도에 상륙 작전을 별인 10개 중대 중 1개 해병중대를 이끌고 최선봉에서 전투를 수행했던 인물. 그는 1871년5월 25일 강화도 근해를 항해하면서 한국에 대한 첫인상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우리 함대가 정박하고 있는 인근주위의 섬들에는 사람들이 살고 있기는 하나 그 수가 적어 보였고 계곡의 초가집에 살고 있었으며 모두 흰옷을 입고 있었소. 이들 조선인은 매일 언덕에 모여 앉아서 우리들이 무슨 짓을 하고 있나를 유심히 관망하고 있는 듯이 보였소. 우리 함정이 항해하다가 이따금 조선선박과 마주치면 언제나 재빨리 항로를 바꾸어 반대방향으로 돌아가는 것으로 보아 그들은 우리와 어떠한 교섭도 원치 않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소 이와 같이 「밀턴」은 조선당국이 철저하게 불교섭 정책을 고수할 것이라고 전망하고 있다.
그러나 1천만의 야만족(조선민족)을 옹유하고 있는 인구조밀 한 이 나라에 이 같은 소병력을 가지고 상륙을 시도한다면 아무래도 꺼림직 한 일이란 것을 당신도 상상하면 알 수 있지 않겠소) 이렇게「밀턴」은 상륙 작전의 결과에 대해서 부정적인 견해를 피력한다.
강화도 내침의 계기는 6월1일에 있었던 손들목 포격사건에서 비롯되었다. 즉 그 전날인 5월 31일 조선측 대표 3명(3∼5품의 하급관리)은 미아시아 함대의 기함 쿨르라드호에 승선하여 교섭을 벌였다. 이들을 맞은 미국 측의「드루」서기관은 수도 한양을 방문하여 조선의 최고책임자와 직접 교섭을 전개하고자 서울을 통하는 수로의 예비탐사작업을 벌이겠다는 뜻을 밝혔다.
결정권이 없는 조선대표가 적극적으로 반대의사를 표명하지 않자 미국대표는 이룰 승인한 것으로 해석하고, 다음날 조선 측의 안보상 요충지인 강화해협 탐사작업에 들어갔다. 이때 손돌목의 조선군 포대로부터 포격을 받은 것이다. 피해는 경미했으나 이 사건 이후 미국 측은 국기에 대한 모독이라며 사과할 것을 주장했고 조선 측은 정당방위라며 서로 맞섰다. 10일이 경과 한 후인 6월10일, 미 함대는 3일에 걸친 강화도 상륙 작전을 벌인 것이다.
그런데 「밀턴」은 뉴욕 타임즈가 「유인」 작전이었다고 까지 보도했던 이 문제에 대해 역사적으로 중요한 증언을 하고 있다. 즉『손돌목 포격사건에 대한 보복으로 우리는 반드시 조선진지에 대한 멋진 격파작전을 벌이게 될 것이오. 정말이지 우리와 대화를 나눈 조선사람(조선대표3명)은 우리 관측함정이 강화해협으로 진입해서 거슬러 올라가더라도 우리 함정에 발포하지 않겠다고 말한 적은 없소. 그러나 우리는 그들이 포격하지 않을 것으로 추측했던 것이오. 이제 우리는 품위를 지키기 위해 그들의 포격에 대한 보복원정을 단행하지 않을 수 없소』 이 사실은 미국 측의 주장과 달리 5월31일의 조선대표가 강화해협 탐측을 반대했다는 점을 암시해주고 있다.
전투가 끝난 후「밀턴」은 그가 목격한 조선군 시체의 처참한 모습을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내가 목격한 광경인데 나는 조선군 요새지(광성보)에서 끔찍한 장면을 보았단 말이오. 조선군 몇 사람이 불에 새까맣게 타버린 채, 그 근처에 떨어진 미군의 9인치 포탄의 폭발로 시체가 산산조각이 나버렸소.
우리 함정의 후 갑판보다도 크지 않은 좁은 지면에 쌓인 시체만도 무려 40구나 되었고 이들 시체의 대부분은 필시 성곽의 흉벽 너머로 내다보다가 머리에 총탄을 맞아 죽은 자 일 것이오. 그런데다가 그들이 입은 흰옷에 붉은 피가 물들어져서 적·백색의 선명한 대조를 이루고 있었소. 』 이것은 당시의 전투상황을 가장 가까이 에서 치르고 그 장면을 생생하게 묘사한 유일한 기록이다.
끝으로 「밀턴」은『입약 (입약)을 위한 미국의 조선원정은 아무런 성과 없이 무위로 끝나버리고 말았소』라고 술회하고 『설령 미국정부가 수도 한양까지 진격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하더라도 우리는 충분한 병력을 보유하지 못해서 내륙까지 진격할 수 없소』라고 기록했다. 이리하여「로저스」제독의 아시아함대는 강화도의 5개 요새지를 함락시켰음에도 불구하고 조선과의 입약은 완전 실패함으로써 미국 해군사상 최초의 실패 극으로 기록되고 있다.
그는 작전이 끝난 후 제출한 별도의 보고서에서 강화도 상륙 작전에 소요된 탄약 량은 1천6백개의 탄약통으로서 장병 1인당 40발의 탄환을 소비했으며 이 작전에 소요된 특별경비는 당시 화폐로 2천9백라·94달러였다고 보고했다. 김 교수는 이번에 발견된 「밀턴」의 참전수기를 토대로 한일련의 연구논문은 로저스 제독의 내침과 어재연 장군의(항전)을 『동방학지』29집에 게재 할 예정이다.

<상당한 솔직성 보여 큰 가치>
▲ 이선환박사(사학자)의 말=문헌을 통해서 그런 사료가 있다는 사실은 알았으나 이렇게 발견되니 반갑다. 신미양요 당시 사령관인「로저스」「로」공사의 기록이 공식적인 경직성을 면치 못한 반면 일선지휘관이나 범사들의 안목은 자신의 양식에 의하여 표현한, 상당한 솔직성을 보이고 있다. <이근성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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