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뱃값 9일 만에 속전속결 … "여론수렴 아쉽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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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뱃값 인상안과 주민세·자동차세 인상안 등 정부가 최근 잇따라 내놓은 증세안을 놓고 논란이 일고 있다. 대표적 논란이 충분한 여론수렴이 없었다는 절차적 문제다.

 박근혜 대통령은 지난해 9월 기초연금을 노인 소득별로 차등지급으로 수정하면서 증세를 할 땐 “대선 때 공약했던 국민대타협위원회를 만들어 국민들의 의견을 수렴해서 해나가겠다”고 밝혔다. 증세는 되도록 안 하고, 한다면 여론수렴 절차를 거치겠다는 약속이었다. 박 대통령은 지난해 1월 대통령직인수위원회가 출범할 때부터 복지재원 마련을 위한 증세론이 나올 때마다 “새로운 세금을 걷는 것이 아니다”고 말해왔다. 그러다 기초연금이 논란이 되자 재차 대선공약인 국민대타협위원회를 거치는 절차를 강조한 것이다.

 그러나 정부는 11일 담뱃값 인상안, 12일 주민세·자동차세 인상안 같은 증세안을 연 이틀 내놓으면서 대타협위원회 같은 논의기구를 구성하지 않았다. 특히 담뱃값 인상 추진은 “지나친 속전속결”이란 지적이 나온다.

 담뱃값 논의는 문형표 보건복지부 장관이 2일 예고 없이 기자실을 방문해 “최소 2000원 올려야 한다”고 말한 이후 일사천리였다. 정부가 담뱃값을 올리기 위한 법률개정안을 입법예고한 게 지난 12일이다. ‘입법예고는 특별한 사정이 없으면 40일 이상으로 한다’는 행정절차법 규정에도 불구하고 12일부터 15일까지만 입법예고했다. 4일간의 입법예고였다. 주말을 빼면 사실상 입법예고 기간은 이틀이다.

 의료영리화 논란을 불러온 의료법 시행규칙 개정안(42일)과 기초연금법 제정안(21일)의 예고 기간과도 대비된다.

 고려대 임현(행정학과) 교수는 “국민의 재산권과 권익에 영향을 끼치는 사안은 그만큼 국민이 충분히 내용을 이해하고 납득하는 과정이 중요하다”면서 “정책의 실효성, 입법 과정의 민주화를 위해선 국민이 의견을 개진할 수 있는 절차가 보장돼야 한다”고 지적했다. 안진걸 참여연대 협동사무처장도 “정부가 성급하게 정책을 결정하면 갈등과 사회적 소모가 불가피하다”며 “지금이라도 조세정의를 위한 협의기구를 만들어야 한다”고 제안했다.

 정부 계획대로 세금을 거두게 되면 고소득층에 비해 저소득층이 상대적으로 조세부담을 더 지게 되는 ‘역진성(逆進性)’이 커지는 것도 논란거리다. 경제학에선 소득세·법인세와 같이 납세자의 능력에 따라 세금액이 달라지는 직접세가 아닌 상품에 세금을 매기는 간접세(담뱃세)나 모든 사람이 동일한 세금을 내는 인두세(人頭稅·주민세)는 조세정의를 해칠 수 있는 세금으로 분류된다. 소득이 클수록 세금을 더 내는 누진세(累進稅)와 달리 소득재분배를 악화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김우철 서울시립대 세무전문대학원 교수는 “(담뱃세와 주민세 등은) 조세저항을 최소화할 수 있는 세금 인상 방법으로 정부로선 당연히 유혹을 느낄 수 있다”며 “복지재원은 소득세와 같은 직접세를 거둬야지 지금 방법엔 동의할 수 없다”고 말했다.

 반면 홍익대 성명재(경제학과) 교수는 “담뱃값 인상은 돈이 없는 청소년의 흡연율을 낮추는 효과가 크고, 지방세는 부담액이 작기 때문에 경제를 왜곡하는 부작용이 적은 방법”이라고 설명했다.

 증세 논란은 앞으로 더 커질 수 있다는 전망이다. 최경환 경제팀이 재정확장을 통한 경기활성화에 초점을 맞추고 있어 필요재원은 더 늘어나는데 세수구멍은 커지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청와대는 이 문제에 관해선 무대응하겠다는 입장이다. 청와대 관계자는 “증세 논란엔 할 말이 없다”고 했다.

박현영·허진 기자

◆인두세(人頭稅·poll tax)=일정 조건을 충족한 모든 사람에게 똑같은 액수의 부담을 지우는 세금. 주민세는 한국의 대표적인 인두세로 통한다. 마거릿 대처 전 영국 총리는 지방 재정이 악화되자 지역세로 불리는 인두세를 도입하려다 1990년 3월 대규모 시위대의 저항을 받았고, 그해 11월 보수당 당수 선거 때 사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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