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왕가의 권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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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지구의 웬만한데선 대개가 그렇다. 약한자를 보면 밑으로 밟아버린다. 그러나 여기서는 위로 받든다. 그렇다고 『아하, 역시…』하고 감탄할건 하나도 없다. 영국사람들이라고 해서인덕들이 유난히 커서 그런건 아니다. 그게 자기들에게 여러 가지로 이롭기 때문이다.
왕가가 그 한 예다. 힘도 없겠다, 남들도 그러겠다, 『요새 세상에 임금님이고가 다 뭐야(고렷적도 아니구)!』하고 누가 떼지어 벌써 나섰을 법도하다. 안 그런다. 거꾸로 위로 모신다. 그것도 보통 모시는게 아니다.
「찰즈」 왕자 결혼만을 봐도 그렇다. 누가 장가 한번 간다고 그렇게 떠들법석은 아니었었다.
「레이건」과 「브레즈네프」가 사돈간이 됐대도 덜 그랬을 거다. 여왕님 손주 보시게 되고 앞으로의 국왕님 왕비 맞으셨으니, 얼씨구, 이런 경사 두번 또 있으랴 싶게 꽤는 들떳었다.
하긴 하도 그동안 기뻐할만한게 없어온게 영국이었으니까 하고 냉소적으로 못볼 것도 아닌지 모른다. 그러나 우리왕, 우리 폐하하는게 어제오늘만이 아니다. 또 좀 예를 들자.
여기사람들 걸핏하면「로열」(폐하의) 이다. 「로열· 메일」(폐하의 우정), 「로열·에스코트」(경마대회)…. 영국엔 도대체 영국군 이란게 없다. 어디까지나 「로열·녜이비」하는 식으로 강하에 충성하는 군대가 있을 따름이다. 야당도 물론「폐하의 야당」이고 하다못해 극단· 무용단에까지 「로열」자가 붙어야 일류로 친다.
언제부터라는 것도 아니고, 누가 그러라는 것도 아니고, 꼭 왜그래야 하는 것도 아니고, 한데 모두가 어물어물 우글우글 이런 분위기를 만들어놓는다. 더 얘기할 것 없다.
곧잘 질그릇 깨지는 소리로, (또 그저, 버릇으로) 적기가를 부르는 노동당들도 포도주잔을 들곤 『여왕을 위하여!』하고 축배를 들이켠다. 그러니까 혹 무슨 유혹이 있대서 누구나 그저 함부로 『왕가만 권위냐』하고 나설 엄두를 좀 내기가 거북하다. 그게 백성들에겐 이일 수 있다. 여기 세관에서 어쩐다고 『아영국이란 신용사회란 말야!』하면서 「아, 어」하는 동포들이 꽤있지만 사실은 영국(또는 유럽) 사회란 근본적으론 불신사회다. 여간해 서로를 믿지 않는다. 더우기 정치건 실권 가진 사람들은 안믿는다.
그러니까 실권 없는 사람에게 압도적인 권위를 줘서 실권있는 사람들을 견제한다는 것은 백성들로선 마음 놓이고 속편한 일이다.
그러니까 신하들 쪽으로서도 그게 덮어놓고의 「폐하여, 폐하여」는 아닌 셈이다. 자기에게도 실속이 있으니까 모시는 거다. <박중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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