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고려청자를 재현한다 강진요 강진군 대구면 사당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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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청자비색은 동양인의 정신이라고 했다.
동양인의 정신은 맑고 고요함을 으뜸으로 삼으니 정적은 곧 무에 도달함이요, 이 무아의 세계에서 빚어진게 고려자기다.
불교에 탐닉했던 고려인들은『청자에서. 티없이 맑은(준정무진) 부처의 세계(불국토)를 본다』했고 고인들은『도를 통해 정을 본다』고도 했다.
온 세계인이 몸살이 나도록 부러워하는 우리네의 도예품 고려청자-.
고려청자하면 강진을 연상하고, 강진하면 고려청자와 한 줄에 묶게된다.
월출산 고운 자락을 뒤로하고 정다산 초당을 마주보며 구강포를 끼고 강진만 꼬리까지 내려가면 이 나라 고려청자의 발상지 고려요 마을을 만난다.

<18만평에 널린 책자파편>
전남 강진군대구면사당리 당전 부락.
부락주변 18만여평의 요지(요지)곳곳에서 채는 청자파편은 고금학자들의 학식이 아니더라도 이 마을이 고려청자의 발상지임을 피부로 느끼게 한다.
우리나라 도요지의 기록은 중국 송나라의 서긍이 저술한『고려도경』과『고려사』등을 비롯해『동국이상국집』에 나타나며 이들을 종합 정리한 것이 소산궁사부의『고려의 고도자』. 여기에 우리나라의 고려청자 발상지가 강진이며 이중 가장 유력한 도요지는 청자기와가 출토되었던 강진군 대구면이란 기록이 있다.
또 현재 국립중앙박물관 및 광주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대부분의 국보 및 보물급 작품들이 이곳에서 나온 것들이다.
이 마을에서 고대요(고대요)의 원형이 발굴된 것은 1973년. 길이8m, 너비1.2m, 높이 1m의 요지는 대구면 사당리130번지 전답에 묻혀 있었다.
6백여년 단절됐던 조상의 얼이 되살아나는 순간이었다. 이를 개기로 청자재현사업은 군 당국과 온 마을 주민들의 특수시책사업으로 확정되었고 77년6월18일 이 가마의 명칭을 지금의「강진요」로 정식 명명하였다.

<도공 7명이 정열 쏟아>
그 옛날 이름 없던 도공들의 뒤를 이어 청자비색 재현사업에 모인 사람들이 광주 무등요의 도예가 조기정, 기술담당간사 이룡희, 소성사 손량호, 성형사 안열수, 조각사 김광철, 정형사 홍성준·윤재진씨 등 7명의 도공들이었다. 이들은 지금까지 만4년간 침식을 같이하며 고려청자 재현에 정열을 쏟고 있다.
첫 화입식이 77년12월27일 하오3시. 고려조이후 6백여년만에 가마에 다시 불이 붙은 것이다.
2백여 점의 작품을 가마에 넣고 장작에 불을 붙이는 순간 주민과 관계자들 모두가 감회에 몸을 떨었다.
초벌구이의 도기가 가마밖에 모습을 드러낸게 이듬해인 78년1월6일 상오10시.
『그 당시 초조했던 것은 말로 표현 못합니다. 온몸이 굳고 가슴이 떨려 가마 안에 들어가기가 겁이 났어요』
기술간사 이룡희씨는 하늘이 무심치 않아 90%이상의 성공률을 1백50여점의 초벌구이를 해냈었다고 회상한다.
1월29일 1백50점의 본벌구이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점화한지 10시간이 다 못되어 역풍이 오면서 화염이 거꾸로 거스르는 요변이 일어났다. 실패였다.
『10년 동안의 도공생활 중 그때처럼 어려운 시련은 없었어요. 차라리 이가마 속에 내 몸을 던져 활활 타버리고 싶은 심정이었읍니다.』

<천여점 한국 혼 되살아>
이씨는 좌절을 딛고 다시 일어나 그해2월3일 국내외 보도진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본벌구이를 꺼내게 되었다.
가마입구에 대기하고 섰던 재현사업추진위원장 정채균 전군수의 손이 가늘게 떨렸다. 하오1시 어두운 가마 속에서 첫 작품 음각국당초문화병의 옥 빛깔 비색이 선녀의 모습으로 나타났다. 성공이었다.『흙 빚기 16년에 그토록 뜨거운 눈물을 흘려 본적이 없어요.』
초벌구이에 유약을 발랐던 조기정 도예공은 그때의 환희와 감격이 지금도 떨려온다고 했다.
가마의 개조와 유약의 개발을 거듭하면서 지금까지 화입한 것이 25회, 1천여점의 한국 혼이 되살아났다.
『지금까지 문화재관리국의 지휘와 군 당국의 보호로 시작품만 나왔습니다. 이 작품들은 전시 보관되지만 곧 시판용이 나올 것입니다.』
박선배 군수는 출토품에 버금가는 작품재현이 4년만에 이루어졌다고 한다.
강진요에서는 절대로 가스를 쓰지 않는단다. 손가락으로 퉁겨 낭랑한 쇳소리가 울리려면 가마의 온도를 섭씨 1천3백20도로 24시간 유지해야한다. 초벌과 본벌구이에 드는 장작만도 한 가마에 10t이다.

<시판 땐 화병 백만원>
앞으로 시판이 되면 매병이나 화병은 1백 만원을 홋가하고 술병 등 소품들은 30만∼40만원을 받게 될 것이라는게 이룡희씨의 말이다.
『손이 아리도룩 도토를 개고 허리뼈가 굽도록 불질을 해도 내 월급이야 고작 20만원 안팎이지만 이 노릇이 돈보고 하는 겁니까.』
주민 정병천씨(50)는 임진왜란 때 왜인들에 끌려 구강포를 떠나며 청자의 단절에 눈물 뿌렸던 옛 할아버지들의 유업을 이은 것이 오직 자랑스러울 뿐이라고 한다.
『도토 좋고 땔나무 많은 것도 원인이지만 예부터 해상수송이 쉽고 손재주 많은 도인들이 있어 우리마을이 더욱 자기고장이 됐답니다.』
성형을 다듬는 김재숙양(22)은 강진요의 고려청자가 세계로 나가는 날 다시 고려의 대명사 마을이 될 것이라며 가슴 부풀어있다. 【강진=고정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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