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SUNDAY가 만난 사람] “저성장·청년실업 해법, 대우 세계경영 정신에 담겨”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390호 08면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이 26일 서울 여의도 중소기업중앙회에서 열린 대우특별포럼에서 대우 해체에 대한 소회를 밝히기 위해 단상에 오르고 있다. [뉴시스]
신장섭 교수

1999년의 대우그룹 해체 과정이 15년이 지난 지금 또 논쟁거리가 되고 있다. 물론 당시 해체를 집행한 관료들은 논쟁을 거부한다. 대우는 무리한 차입경영과 지나친 확장 투자로 빚이 너무 많았고 외환위기가 닥치자 살아날 방법이 없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김우중 전 대우 회장은 최근 신장섭 싱가포르국립대 교수와 대담 형식으로 엮은 책을 내고 ‘대우 기획해체설’을 주장했다. 수출금융을 터주면 살릴 수 있었던 회사를 김 전 회장을 불편하게 생각했던 관료들이 망하게 했다는 내용이다.

『김우중과의 대화』 책 펴낸 신장섭 교수

김 전 회장의 억울한 마음을 이해한다 해도 당시 재계 2위였던 대기업을 정부 관리가 사사로운 개인 감정으로 문 닫게 했다는 건 설득력이 떨어진다는 지적이 많다. 오히려 외환보유액이 바닥난 당시 한국 정부는 대우를 도울 능력이 없었다고 보는 편이 타당하다. 관료집단과 김 전 회장이 충돌한 지점은 결국 국제통화기금(IMF) 관리체제에 대한 대응방식이다. 관료들과 대다수 경제학자는 IMF 처방에 따라 철저한 구조조정을 하는 것만이 살 길이라고 봤다. 반면 김 전 회장은 외환위기가 기업이 아닌 금융의 문제인 만큼 수출을 늘려 무역흑자 500억 달러를 달성하면 IMF 체제를 극복할 수 있다고 맞받았다. 공교롭게도 IMF는 한국을 마지막으로 위기 국가에 지원할 때 긴축 처방을 요구하지 않는다. 크리스틴 라가르드 현 IMF 총재는 아예 긴축정책의 위험성을 경고할 정도다. 그렇다고 김 전 회장의 주장이 맞았던 걸까. 김 전 회장과 함께 책을 낸 신장섭 교수를 만나 물어봤다.

-당시 IMF 처방에 어떤 문제가 있었다는 건가.
“한마디로 엄청나게 무자비한 처방이었다. 금리를 하루아침에 10%에서 30%까지 올리라고 했는데 한국에 대해 그렇게 할 이유가 없었다. IMF가 고금리 처방을 한 것은 그 직전에 외환위기를 겪은 멕시코 등 중남미 국가의 경우 물가가 치솟았기 때문이다. 그 나라들은 통화를 방만하게 운영했고 재정적자도 컸다. 반면 한국은 물가가 높지 않았고 재정적자도 심하지 않았다. 거시경제가 상대적으로 건전한 나라에 고금리 처방은 경제학적으로 말이 안 된다.
위기 상황에서 긴축정책을 쓰면 돈이 마른다. 국내 자본을 동원할 길이 봉쇄되는 거다. 한국 기업의 당시 평균 부채비율 360%는 국제적으로 비교했을 때 높은 수준이 아니었다. 80년대 후반 프랑스 기업이 평균 350%, 이탈리아와 노르웨이 기업도 비슷한 수준이었다. 일본 기업은 중화학산업을 일으킬 땐 500%가 넘었다. 게다가 국제 금융기관들도 아시아 시대가 열린다며 ‘우리 돈 갖다 쓰라’고 하던 시절이다. 다시 말해 부채비율이 위기를 불러올 수준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외환위기 이후 일상화한 저성장·양극화가 IMF 처방 때문이란 말인가.
“IMF는 제일은행을 매각할 것을 요구했다. 그게 한국 경제를 선진화하는 것과 무슨 상관이 있나. 지금 국민은행·삼성전자 등의 외국인 지분율이 높다. IMF 체제를 거치면서 한국 경제의 심장을 다 내준 거다. 양극화·저성장 같은 지금 한국 경제의 문제들이 그때 다 생긴 거다. 부채비율 축소, 구조조정이 만병통치약이라는 건 말이 안 되는 해법이었다. 빚을 내 제조업에 투자하는 게 잘못된 것이라고 하니 은행들은 기업대출 대신 가계대출로 옮겨 갔다. 지금 한국의 가계부채가 엄청나게 높은 게 경제의 발목을 잡고 있지 않나.”

-그래도 당시 IMF 처방 덕에 2008년 세계 금융위기를 원만하게 넘긴 것 아닌가.
“그렇게 보지 않는다. 2008년 한국은 엄청난 외환보유액을 갖고 있었지만 원화 환율이 급등했다. 키코(KIKO) 사태도 겪지 않았나. 국제금융의 변동에 따라 경제가 흔들리는 구조를 만들어 놔서 두고두고 피해를 보는 거다. 그리고 저성장이 고착된 것에 대해 아무도 얘기를 안 한다. IMF의 말이 선진적이고 미국 시스템이 맞다는 인식이 너무 강하게 박혀 있다.”

-그럼, 김우중 전 회장의 말대로 했으면 한국이 IMF 체제를 벗어날 수 있었을까.
“지난 15년을 돌이켜 보면 김 전 회장의 얘기가 옳았다는 증거가 곳곳에서 드러난다. 외환위기 당시 한국 경제에 구조적인 문제가 너무 많다는 자성론이 판을 쳤다. 김 전 회장의 혜안대로 2000년대에는 신흥시장의 시대가 열렸다. 중국이 아프리카와 중앙아시아를 독식하고 있지 않나. 대우가 만약 해체되지 않았다면 중진국 출신 최대 다국적기업이라는 위치를 계속 유지했을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한국은 외환위기 비관론에만 휩싸여 그 기회를 놓쳤다. 그때 구조조정해서 외국에 자산을 헐값에 팔아 손해 본 게 얼마나 많나. 한국 기업이 부채비율을 낮추라는 IMF 프로그램 때문에 2000년대 들어 제조업 투자를 등한시한 것도 아쉬운 부분이다.”
신 교수는 “이 책에서 대우 해체에 대한 논란보다 더 역사적으로 길게 남을 부분은 대우의 세계경영에 대한 재해석과 신흥시장 진출에 관한 교훈”이라고 말했다. 한국이 현재 당면한 저성장이나 청년실업 등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도 대우의 세계경영이 주는 의미가 크다는 것이다.

-세계경영을 부정적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신흥국에서 사업은 단순 비즈니스가 아니라 정부와 정치인을 상대해야 하고 이들에게 경제 발전의 노하우를 제공하면서 돈을 벌어야 한다. 김 전 회장이 이윤만 추구하는 일반적인 사업가였다면 역량을 발휘하지 못했을 것이다.
20세기가 미국의 시대였다면 21세기는 신흥국의 시대라고 할 수 있다. 중국이 곧 경제 규모에서 미국을 추월할 것이다.
미래의 먹거리는 신흥시장에 있다. 대우의 세계경영은 신흥국 출신 기업이 신흥시장에 어떻게 진출하고 이를 어떻게 세계적인 범위에서 엮어내는지에 관한 교본을 제시하고 있다. 신흥국 출신 기업은 선진국 출신 다국적기업들이 갖고 있는 기술력과 자본력에 대항할 다른 무엇인가를 갖고 있어야만 성공할 수 있다. 대우는 그런 것들을 세계적 규모에서 종합적으로 만들어 낸 첫 번째 사례고, 그 결과 신흥국 출신 최대 다국적기업으로 발돋움했는데 이게 꽃을 피우지 못해 아쉽다.”

-김 전 회장이 베트남 하노이에서 벌이는 글로벌 YBM(Young Business Managers) 과정의 의미가 뭔가.
“김 전 회장은 2012년부터 글로벌 YBM 백만 양병론을 펴고 있다. 경제활동인구의 20%는 해외에 나가도 된다고 본다. 젊은이들이 신흥국에 나가면 처음엔 연봉이 적고 힘들어도 더 저축할 수 있고, 성장할 수 있는 기회도 더 많아진다. 해외에 나가려는 젊은이들을 ‘대우인’처럼 조련하고 있다. 한국의 청년실업 해소에 기여하면서 한국 경제의 국제적 기반을 다지는 일이 될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다. 젊은이들에게 그냥 세상에 나가라고 하는 게 아니라 대우인들의 경험을 바탕으로 제대로 된 실무교육을 해 일자리를 찾아주겠다는 것이다. 김 전 회장은 말했다. ‘이제 나는 나이가 들어 직접 할 수 없으니까 우리 젊은이들이 나 대신 세계에서 사업할 수 있도록 키우는 데 내 여생을 바치려고 해요’.”



신장섭 교수는
▶서울대 경제학과 졸업 ▶영국 케임브리지대 경제학 박사 ▶싱가포르국립대 교수 ▶기획재정부 정책자문관 ▶저서 『금융 전쟁』 『한국경제, 패러다임을 바꿔라』

박성우 기자 blast@joongang.co.kr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