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시와 불여우|유종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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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저쪽의 창작동화가 들어오기 이전 어린이들의 상상력교육을 담당했던 것은 주로 할머니들이 들려주는 전래동화였다. TV의 공상과학만화에 익숙한 도회의 상상력에게는 가난하고 누추해 보이겠지만 친숙한 동물들이 자주 나와 자연과의 관계가 보다 직접적이었던 시절의 산물임을 시사한다.
전래동화에 빈번히 등장하는 모티브의 하나는 유혹의 모티프이다. 구슬과 입맞춤으로 순진한 글방총각을 반하게 만든 예뿐 색시는 웃어른의 지시대로 총각이 구슬을 삼켜버리자 큰 여우가 되어 죽어 버린다.
그리하여 꼬리가 아홉 개나 된다는 구미호나 불여우는 전래동화의 단골 등장인물이다.
예쁜 색시로 변한 구미호 이야기는 단순히 여잡을 조심하라는 유교적 설교를 담고 있는 것은 아니다. 겉으로 보이는 것과 실상이 다른 것이라는 사실, 조금 현학적으로 말해본다면 현상과 실체는 다르다는 것이다.
천하의 장사도 현상과 실체를 제대로 판별하지 못할 때 타고난 기운을 써보지 못하고 쓰러지고 만다. 날개를 가지고 태어난 장수는 유혹자의 시험을 통과해서 겉보기와 실상을 꿰뚫어보는 지모를 갖추고 있음을 드러내고서야 비로소 장수로서의 한몫을 하게 되는 것이다.
전래동화에 있어서도 삶은 힘과 꾀, 폭력과 지모를 동원하는 싸움의 연속으로 파악된다.
힘이 없으면 꾀가 있고 기운이 세면 대개 꾀가 없다. 힘과 꾀를 아울러 가진 자가 영웅이고 둘 다 갖추지 못하면 축에 끼지를 못한다.
따라서 이야기 속에 얼굴을 내밀지도 못한다.
못난이는 옛이야기의 주인공이 되지 못한다. 그리고 온달은 바보였을 지는 모르나 머저리는 아니었다.
힘이 세지 못한 여성이 꾀가 많은 것으로 나타나는 것도 당연하다.
이야기란 물론 재미있어야 한다. 그리나 아무런 가르침도 주지 않는 이야기가 재미있을 수는 없다. 할머니들은 재미있는 이야기를 해달라는 손주놈의 청을 들어주면서 거기에 지혜의 심지를 박아놓기를 잊지 않았다.
시대가 변하고 강산이 변하였다. 전기가 들어가고 고속도로가 뚫리면서 호랑이와 불여우도 우리들의 농민처럼 우리들의 고향을 떠나갔다. 능구렁이와 이무기와 도깨비와 더불어 다투어 자취를 감추어 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수상한 화성인과 초능력의 신판 장수들이 상상력의 새 공간을 채우고 있다.
세계가 다양해지고 사회가 복잡해지더라도 예쁜 각시와 불여우를 판별할 수 있는 지혜는 변함 없이 중요하다. 그것은 살아남기에 직결되는 존속가치의 하나다. 유토피아 없는 세계지도가 펴볼 가치가 없는 것처럼 현재가 될 수 없는 과거는 아무런 가치도 없다.
이야기를 통해서 색시와 불여우를 구분하라고 과거는 현재에게 말해주고 있다. 그리고 이것이 전통이라는 것이다.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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