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원곡 독립만세사건 주동자 후예들-안성순 원곡면 칠곡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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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룩….』
할아버지도 할머니도 동네 꼬마들도 태극기 앞에 모여 애국가룰 부른다. 매일 아침 국기 계양식 때마다 부르는 애국가이건만 그때마다 주민들의 가슴속엔 조국에 대한 사항과 헌신의 결의가 더욱 새롭게 다져지고 있다.
비탈진 구릉 아래로 손바닥만한 논·밭뙈기가 널려있고 땀 밴 작업복에 까맣게 그을은 모습은 여느 농촌의 농사꾼과 다를 것이 없지만 그들의 두 눈빛은 독립투사의 후예라는 긍지가 역력히 빛나고 있다.
경기도 평택에서 동북쪽으로 10여㎞ 떨어진 안성군 원곡면 칠곡리l. 이곳이 l백여명의 독립투사가 우리나라 독립운동사상 3대사건의 하나인 「필곡 독립만세사건」을 일으킨 본고장이자 1백70가구 1천2백여 주민이 선열의 얼을 간직하고 살아가는 「독립유공자 마을」임을 아는 사람은 드물다.
이들 독립투사의 업적이 발굴돼 정부의 인정을 받은 것은 불과 4년전인 77년의 일. 당시 항일투쟁에 가담했던 열혈 청년들은 대부분 세상을 떠났고 생존자는 단 2명뿐.
마을 어디를 돌아봐도 의거의 흔적은 찾을 길 없고 그 흔한 기념비조차 세워져있지 않지만 유족이나 직계후손은 물론, 온 마을 사람들도 선조들의 활약상을 어제의 일처럼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가구 당 평균 10마지기의 농토 외에는 별 다른 소득원이 없어 연간소득은 2백여만원의 넉넉지 못한 살림. 기념사업이나 세상에 널리 알리는 일들을 이루어 놓지는 못했어도 나라를 위하는 일에는 목숨을 아끼지 않는 투철한 애국정신만은 온 마을의 생활신조가 되어 모두의 마을을 풍요하게 해주고 있다.
이 작은 마을에서 6·25에 화랑무공훈장을 밤은 역전의 용사가 2명이나 나온 것도 결보 우연한 일은 아니다.
경주 이씨 집안이 대종을 이루고 있는 이 마을에서 항일의 횃불이 오른 것은 서울파고다공원에서 기미 3·1만세사건이 일어난 지 한달 뒤인 같은해 4월초.
당시 이 고장의 한학자이며 서당스승이던 이유석 옹(77년 건국포장추서)과 이양섭 열사(68년 건국공로훈장 국민장추서) 홍찬섭·이시년씨 등이 주동이 되어 20대 농촌청년이던 이근수·이규동·이규완· 이유복· 이성렬· 서우돈·박용업 등과 합세, 서울의 독립만세사건에 영향을 받아 민중봄기를 일으켰다.
이들은 독립선언서와·몰래 만든 태극기를 원곡면과 양성면 주민들에게 나누어 준 뒤 『빼앗긴 조국의 주권을 도로 찾기 위하여 우리는 총 궐기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하여야한다』고 역설했다. 수백 군중들은 한 손에는 태극기, 다른 손에는 쇠고랑·도끼·삽 자루를 들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일본인들이 세운 면사무소며 우체국·주재소 등을 닥치는 대로 부수고 불질렀다.
불시에 습격을 받은 일본관헌들은 뿔뿔이 흩어져 달아났으나 연락을 받고 출동한 일본군이 시위중인 부락민을 닥치는 대로 두들겨 패면서 연행했다.
이병섭 최항진 최만포 조경수 등이 시위현장에서 맞아 죽었고 안재철 최순옥 최경용 강봉소 최화림 윤영삼 이우경 등은 고문 끝에 죽음을 당했다.
현장에서 연행돼 옥고를 치른 애국청년의 수는 1백26명에 달했다.
현재까지 살아남은 사람은 이규동 옹(88·원곡면 칠곡리 용소동433)과 이영우 옹(81·평택군 팽성읍) .
역사의 현장을 지키며 살아 온 이규동 옹은 『거사에 동생 규완이와 함께 가담했다가 규완이는 왜놈에게 뭇 매를 맞고 견디다 못해 3개월만에 숨졌다』면서 『그때를 회상하면 비록 늙은 몸이지만 지금도 가슴속에 불기둥이. 치솟는 것 같다』고 했다.
모든 게 어제 일처럼 기억이 생생하다는 이 옹은 『일본경찰이 얼마나 악독한지 취조하는 것이 곧 두들겨 패는 일이어서 입고있던 솜바지에 피가 배어 나와 감방마룻 바닥에 늘어붙곤 했다』고 치를 떨었다. 부러진 손목과 살이 팬 다리의 상처가 이 옹의 말을 증명하고 있다.
원곡면에서 일어난 이 엄청난 항쟁사는 자칫 역사의 그늘에 가려진 채 망각 속으로 빠져 영원히 빚을 보지 못할 뻔했다.
선친이나 집안 어른들로부터 의거를 전해듣기는 했으나 농사일만 해온 후손들이 선조들의 활동에 대한 근거가 될만한 자료를 한 장도 구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던 중 이 고장 출신으로 독립운동사를 연구하던 한학자 김태형 옹(80·안성군 안육청중학교 재단이사장)이 유공자 중의 한 사람인 이상신의 손자 규만씨(38·원곡면 죽백리75) 집에서 일본 법원의 판결문을 발견, 이를 근거로 수소문 끝에 77년 부산에 있는 정부보관문서창고에서 이 고장 출신 1백26명의 독립투사에 대한 판결문을 찾아낸 것이다.
유족회(회장 이돈영·65·원곡면 칠곡리 방산동231)에서는 이 자료를 토대로 그해 정부에 독립유공자 심사를 신청, 국민장 1명, 건국포장 8명, 53명에게는 대통령표창이 내려졌다. 나머지 64명은 자손이 없거나 행방불명된 것으로 밝혀져 유공자 선정에 들지 못했다.
유공자 중 이성렬씨(해방 전 사망)는 아들 규설씨(57·칠곡리 북쪽 마을)가 6·25 때 금화지구전투에서 소대장으로 북괴군과 싸우다 오른쪽 다리에 부상해 화랑무공훈장을 받는 등 2대째 내려오는 원호가족.
그 동안 유공자가족들은 서울·수원 등 도시로 흩어지고 현재 직계후손으로는 20가구 1백20여명이 남아있으나 다른 주민모두가 독립항쟁의 현장에 사는 긍지를 갖고 있다.
그러나 유족들은 대부분 궁핍한 생활을 면치 못하고 있다. 유족회 총무인 이규설씨는 『가장이 젊었을 때 옥고를 치러 일찍 죽거나 몸에 병이 들어 가족들을 돌보지 못해 유공자 가족들은 못 배우고 못 사는 사람이 더 많다』고 했다.
품팔이로 살고있다는 주장소씨(59·대통령 표창·유공자 주주봉씨 유족)는 『정부에서 매월 주는 3만5천원의 보상금이 큰 보탬이 된다』며 『아들 4형제를 공부 못시키는 게 한이 된다』고 했다.
유족회는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선열의 뜻과 정신을 길이후손에 전하기 위한 사업에 착수했다.
오는 7월15일까지 가구 당 3만원씩을 모아 사업추진기금을 만들고 관계기관에도 지원을 요청, 기념비건립, 독립항쟁사 편찬, 유가족복지기금 조성을 해나갈 계획이다. 【안성=홍성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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