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자 편에 서겠다는 엄마, 딸이 자랑스럽대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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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여성으로서 힐러리 클린턴을 존경한다는 박향헌 LA 고등법원 판사는 “그렇다고 정치인을 꿈꾸는건 아니다”라고 선을 그었다. 더 많은 이민자와 여성·소수자를 돕는 판사가 현재 꿈이다. [안성식 기자]

최초는 주목받는 영광의 자리지만 뒤따르는 부담도 만만치 않다. 지난 6월 미국 로스앤젤레스 카운티 고등법원 판사 선거에서 한인 여성 최초로 당선된 박향헌(52)씨는 “이민 1.5세대 첫 주자라 지켜보는 눈이 많지만 늘 하던 대로 정직과 최선으로 책임을 다할 뿐”이라고 말했다. 판사를 선거로 뽑는 미국에서 그는 한인사회의 지지와 다인종 동료들의 호의를 두루 받으며 “선거 캠페인을 즐겼다”고 했다.

1994년부터 로스앤젤레스 카운티 연방 지방검찰청 검사로 재직하며 성범죄와 가정폭력 분야에서 전문성을 인정받은 그는 ‘앤 박(미국명)은 너무 칼같이 자른다’는 평을 들을 만큼 엄정하고 공평한 일솜씨로 이름이 났다. 2012년 방한 때 ‘나주 초등생 성폭행’ 사건에 대해 예방책은 ‘무조건 신고와 엄중한 처벌’이라 강조했던 그답다.

 박 판사 당선자는 26일 개막해 29일까지 경북 구미시 호텔 금오산에서 열리는 제14회 세계한민족 여성네트워크(KOWIN)에서 28일 ‘도전하는 삶은 즐겁다’란 제목으로 강연한다. ‘경력단절 예방 및 일·가정 양립을 위한 글로벌 파트너십 강화’라는 행사 주제가 마음에 와 닿아 할 말이 많다고 했다.

 “고등학교 다니다 이민 간 뒤 몇 년 안 돼서 제가 법대에 간다 했을 때 주변에서 놀라는 눈치였어요. 그런 저를 보고 어릴 때 미국에 건너온 친구 몇이 법대를 지망했지요. 기분 좋더라고요. 뒤늦게 결혼해 아이 기르느라 집 가까운 변두리 검찰청에 근무했더니 동료들한테 자꾸 밀리는 거예요. 남편과 의논해 도움을 약속받은 뒤 출퇴근에 몇 시간 걸리는 중심지로 옮겼더니 일에 속도가 붙더군요. 훌륭한 파트너를 만나는 게 중요해요. 판사 선거에 나간다 했을 때 열렬히 응원해준 이도 신랑이었죠. 제 꿈을 아니까요.”

 중학교 사회·역사 교사인 남편 김세진(47)씨와 딸 총민(12), 아들 요한(8)은 그의 든든한 파트너다. 앞으로 더 많은 여성과 약자, 이민자를 위해 일하는 판사가 되겠다는 엄마의 신문 인터뷰 기사를 보고 딸이 ‘가슴이 터질 정도로 자랑스럽다’고 했을 때 제일 보람찼다고 했다.

 최근 한국사회의 중요 문제로 떠오른 성범죄에 대해 전문가로서 조언을 해달라고 부탁했더니 “사람이 사는 곳이면 어디나 마찬가지인 고민거리”라고 조심스러워 했다.

 “미국도 성범죄가 많은 만큼 법적 구속과 형량을 높여가는 추세죠. 교육 정도나 신분 고하를 막론하고 절대 가볍게 넘어가서는 안 되는 일입니다. 처음엔 경범이지만 거의 대부분 재범이 되고 끝내 안 좋은 결과로 이어지기 때문이죠. 이번 기회에 한국이 성범죄에 대한 경각심을 높이고 현실에 맞는 법제도를 구축하길 바랍니다.”

글=정재숙 문화전문기자
사진=안성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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