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78)<제73화>증권시장(16)증권금융자금 시비|이현상<제자=필자>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1면

한국연합증권금융이 설립되었으나 자본금을 몽땅 거래소 수리자금에 털어 넣었으니 개정휴업상태나 다름없었다.
그리하여 거래소와 증권협회·연증의 3음가 힘을 합쳐 재무부와 한국은행측에 자금지원을 강력히 요청했다.
주느니 못 주느니 한동안 실랑이를 벌이다가 56년 4월에 열린 금통위에서 증권금융자금 3천만원의 방출이 의결되었다.
부족한 금액이었지만 증시로서는 가뭄 끝의 단비였다. 융자금의 담보비율은 국채나 주식이나 구별 없이 시가의 60%로 정했고 담보대상 증권은 거래소에 상장된 주식에 국한시켰다.
취급되었던 담보증권은 거래소의 출대증권을 비롯해 저축은행·상업은행·남선전기·해운공사·조선은행·흥업은행·경성방직·경성전기·조선운수·조선공사 등 당시 3천만원을 얻어내기까지는 숱한 난관에 부닥쳐야 했다. 대부분의 금통위원들이 금융계출신이었던 까닭에 증권에 대한이해는 매우 인색했다.
말하자면 민간자본의 동원은 은행을 통해서 하는 것이라는 생각. 저축을 장려하는 것만이 자본형성의 정도라는 선입견, 여기에다 증시이야기를 꺼내기만 해도 질색할 경도의 부신까지 겹쳐 있었던 것이다.
앞서도 여러 차례 언급했지만 여기서 윤인상 재무차관의 전폭적 이해와 지원을 또 들먹이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윤 차관이 후일 재무부를 떠나 증권거래소 이 사장이 되어 금통위에 증권금융의 총액을 요청하자 사정은 더 어려워졌다.
참 세상은 매정한 것인가 보다. 어제의 관계를 모른 체하고 금통위원들은 윤 이사장에게 한결같이 등을 돌렸고 심지어는 재무부 측 대표위원들까지 반대의견을 피력하지 않는가.
『도박장을 위해서 돈을 대라고 하는 거냐.』
『정부시책을 투기화 시키려는 것이냐』는 별의별 소리가 다 쏟아져 나왔다.
이같은 정확에서도 금통위원을 정하고 있던 윤 이사장은 고군분투. 간신히 5백만원의 증액을 얻어냈다.
금융계에서 중권금융의 책정을 그토록 반대했던 보다 구체적인 이유는 증권의 유통력과 담보능력이 미약한 상태에서 만일 증권을 담보로 해서 돈을 빌려주었다가 일이 터지면 자기들만 손해라는 생각에서였다.
그들의 이러한 우려가 반영되어 기업이나 일반인은 증권금통 융자대상에서 제외되었고 증권거래소와 연증에 대해서만 금융을 허용하는 것으로 타협을 보았던 것이다.
증권금융이란 기계로 치면 윤활유에 해당하는 것으로 없어서는 안될 존재다.
중권을 지니고 있는 사람이 돈이 필요할 때 증권을 담보로 해서 돈을 빌어쓸 수 있고 돈이 없어 사고 싶은 주식을 못사는 사람들에게는 돈을 유통해 줘서 증권의 원활한 유통과 가격안정을 도모하는 것이 저금의 소임이다.
이에 따라 증권금융은 거래소에서 매매한 것을 뒷바라지 해주는 투자금융과 금융기관에서 증권을 담보로 융자해주는 담보금융으로 대별된다.
전자의 경우는 증권을 사는 매수자에게 필요한 자금을 빌려주거나 신용거래(대주)를 가능하도록 해주는 것인데 초기 증권시장에는 신용거래는 거의 없었고 거래소와 연증을 통해 주식매입에 돈 빌려주는 일만 맡았었다.
후음인 담보금융은 은행에 누구든지 증권을 가지고 가면 담보비율에 따라 융자를 받을 수 있는 것이지만 앞서 언급했듯이 은행들의 반대로 일반 투자가들이나 기업들은 이것을 이용할 수 없었다.
따라서 당시의 증권금융업무는 거래소가 청산거래를 하는 과점에서 일어나는 청산가도 금융을 맡았고 거래소에 대해서 돈올 빌려주는 담보금융을 맡는 등 이완화가 되어있었다.
이후 취급상에 여러 가지 불편과 모순점이 드러나 모든 증권금융업무는 연증에서 하기로 하고 거래소는 오로지 증권의 매매만을 관리하도록 해 지금과 같이 완전 분업화가 이루어졌다. <계속>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