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73)|제73화 증권시장<제자=필자>(11)-증권거래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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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증권협회의 창립과 때를 같이해 재무부에서는 증권거래법의 입법을 서두르고 있었다.
주무국장인 황호영 이재국장은 당초 정부의 입법안으로 국회에 제출하려 했으나 마침 2대 국회의 회기 말이 임박했던 때라 도저히 시간에 댈 수가 없었다. 정부제출 입법안건은 법제처를 경유해야하므로 시간이 많이 걸렸기 때문이었다.
결국 편법으로 나온 것이 야당의 경제통이라고 알려졌던 김영선 의원 외 21명의 이름으로 해서 국회 안으로 제출됐다.
말이 국회 안이었지 사실 필자가 하나서부터 열까지 초안한 내용들이었다. 증권업자 측에서는 증권거래소를 주식희사로 만들자고 강력히 요청해 왔으나 초안자인 내 판단으로는 역시 회원제가 낫다는 생각을 고수했다.
국회제출안을 하루빨리 확정짓기는 해야겠는데 이 문제를 놓고 꼬장꼬장 시비가 벌어졌다.
학교선배인데다 식산은행 시절부터 같이 근무해온 황 이재국장은 보다못해 필자가 만든 원안을 그대로 국회에 제출케 했다.
제2대 국회에 제출된 증권법은 제2독회까지 순조롭게 진행되어 나갔다고 찬반토론에 붙여지면서 분위기는 금새 통과될듯해 안심하려는 순간 일이 벌어졌다.
예산결산위원장이며 당시 여당인 자유당의 소장중진으로 알려졌던 이충환씨가 결정적으로 반대의견을 들고나섰던 것이다.
결국 표결에 붙여져 한 표 부족으로 다음 회기에 이월되고 말았다. 회의가 끝나자 황 이재국장은 경기고 1년 선배라 평소 허물없게 지내던 이충환씨를 붙잡고 대체 그럴 수가 있느냐고 따졌다.
이충환씨 말인즉 『여당에 사전협의 한마디 없이 야당의원 이름으로 법안을 냈으니 제대로 되겠어』라고 껄껄 웃어넘겼다.
이 당시 증권계가 안고있던 또 하나의 큰 숙제는 중권거래소 건물을 되찾는 일이었다.
일제하에서는 조선증권취인소로 사용되던 것이 6·25동란 통에 거의 파괴된 데다. 그나마 미군정이 위촉한 청산인에 의해서 관리되고 있었다.
청산인은 당시 한국신탁은행장이었으며 경성부동산회사와 연희대학교가 각각 나누어 사용하고있었다.
자나깨나 증권협회 쪽은 원래의 집으로 들어가게 해달라고 재무부를 졸라댔지만 엄연히 임대차계약까지 맺어있는 것을 쉽사리 뒤집을 수가 없었다.
재무부로서도 증권업계의 심정을 충분히 이해하고 우선 연대 측에 해약해줄 것을 강력히 요청하기에 이르렀다. 절반은 성공한 셈이었다.
그러나 경성부동산 측은 청산인이었던 한국신탁은행의 자매회사라는 점을 십분 이용해 여간 만만치가 않았다.
진짜 속셈은 그 자리에 자기네들의 건물을 짓겠다는 것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아닌 밤중에 홍두깨라고 미 공군들이 나타나 거래소 건물로 밀어닥쳤다.
때마침 이 현장을 목격한 증권협회의 김간석 전무가 이중재 재무장관에게 달려가 이 사실을 보고했고 재무부 역시 생각지 못한 일이라 부랴부랴 사태수습에 나섰다.
내용인즉 연대 측이 임대차계약을 해약하기 이전에 이 건물을 실내체육관으로 개축하기 위해 미 공군으로부터 소요자재 일체를 지원 받기로 약속되었던 때문이었다. 그간의 경과를 몰랐던 미군들은 곧 돌아갔지만 연대로서는 체면손상이 말이 아니었다.
결국 청산위원회 측은 중권협회·연대·대한상이용사회 등을 놓고 삼자입찰에 붙여졌으나 재무부의 강력한 후원으로 최종 승리는 증권협회에 돌아갔다.
당시 연대 측은 모 유력 인사를 통해 경무대 고위층을 움직였다는 것이고 대한상이 측에서도 이기붕 국회의장을 통해 막후교섭을 벌였다.
그러나 입찰로서는 승부를 가리기 어렵다고 판단한 이 재무장관은 전격적으로 입찰을 무기연기 해버리고 관계 요로와 합의하에 증권협회를 넘겨주었다.
53년 11월부터 발단이 된 이 문제는 55년 6월에 가서야 결말을 본 것이다. <계속> 【이현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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