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백의 책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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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마리아·릴케」는 그의 대표작 『말테의 수기』에서 『책은 원래 공허한 것이다』고 외친 일이 있었다. 요즘 시중서점엔 정말 공백의 책이 나와 화제가 되고 있다.
국판에 3백60페이지. 저자나 내용은 공백인채 장정만은 제대로 모양을 갖추었다. 정가는 무슨 근거인지 아뭏든 2천원.
이런 이변(?) 은 일찌기 금세기초「유럽」과 미국에서 일어났던 문학파 미술운동의 하나인 다다이슴시대 (1915∼22년)에나 있을법한 일이다.
다다(dada)란『아무런 뜻이 없다』는 말. 이 운동을 이끈 「루마니아」태생의 시인「트리스탄·차라」는 모든 전통의 가치, 합리주의적 사고·형식등을 거부하고 속박으로부터의 해방을 외쳤었다. 따라서「파리」의 전시회엔 다다이스트들에 의해 아무 형상도 없는 백지의 캔버스를 걸어놓는 해프닝도 일어났다.
이것은 1910년대에 인류가 처음으로 겪은 세계대전에서 무수한 사람들이 죽어가는 것을 본 문화인들에 의한 반동이었다.「책」이라는 한자는 원래 대나무 (죽) 조각올 나란히 엮은 모양의 상형문자에서 비롯되었다. 옛중국사람들은 대나무조각에 글자를 새겨 그것을 엮어 책으로엮었다.
영어 「북」 의 어원도 「너도 밤나구」 (beech). 고대「게르만」 민죡이나 북 「유럽」사람들은 2세기무렵 그들이 사용하던「룬」문자를 너도밤나무 널판지에 새겼던 모양이다. 책이나 「북」이나 어원이 비슷한 것운 흥미있다.
책이 정작 종이로 엮어진 것은 고대 「이집트」의 「파피루스본」 이 처음이다.
파피루스는 「나일」강 상류에 번성하는 수초의 하나. 「이집트」사람들은 이 파피루스의 껍질로 종이 비슷한 것을 만들었다. 그때 기원전3천년의 종이책이 지금도 「파리」「루브르」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소「아시아」를 중심으로 한「그리스」나「로마」에선 기원전3세기무렵 양피지· 우피지의 책이 있었다.
근세에 이르러 괴기취미를 가진 사람들이 있어서 인피장정본이 등장하기도 했다. 그가운데 유명한 책으로는「프랑스」의 천문학자이며시인인「카미유·플라마리옹」박사의 시집 『공중의 토지』도 한권 들어있다. 그의 시를 좋아하던 어느 백작부인이 젊어서 세상을 떠나며 자신의 설피로 그 시집을 장정해달라는 유언을 남겼다.
2차세계대전중엔 「나치」독일의 어느 포로수용소 소장 부인은 「히틀러」의 저서『마인·캄프』를 포로들의 인피로 장정한 일도 있었다.
각설하고-.
영국작가 「찰즈· 디킨즈」는 『책의 등과 거죽이 가장 좋은 책들이 있다』고 빈정댔다.
요즘 화제의 백지책은 장난스러운(?) 상혼의 발로겠지만, 어떻게 보면 예술적 고갈·무생명· 창조력의 결핍을 비웃는 것도 같아 한편「아이러니」를 느끼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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