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절 독립정신 준수에 심신 바쳐-고 이갑성 옹의 생애와 민족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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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오등은 자에 아 조선의 독립국임과 조선인의 자주민임을 선언하노라….』
해방 후 매년 3·1절이면 독립선언문을 낭독해 그날의 숭고한 민족혼을 되새겨 주던 연당 이갑성 옹. 78년 6월 건강이 나빠져 79년부터 3·1절 기념식장에 나가지 못했으나 3·1절만 다가오면 『몸이 회복돼 독립선언문을 내가 낭독해야 할텐데…』하고 입버릇처럼 염원해왔다.
이제 비폭력 저항의 독립운동을 주도해 이 나라 역사의 한 장을 숭고하게 꾸며줬고, 이끌어줬던 「마지막33인」의 육성은 더 이상 듣지 못하게 됐다.
이 옹은 일제의 식민역사를 벗겨내고 한민족의 자주독립을 성취, 국가의 번영을 지켜본 정신적 지도자며 견인차였다.
독립운동가·정치가·민족지도자였던 연당은 임종을 앞두고서도 『조국통일을 보지 못한채 무슨 면목으로 옛 선열들을 대하겠느냐』고 조국의 앞날을 걱정했다.
고 이갑성 옹은 1886년10월23일(호적에는 89년 생)경북 대구에서 태어났다.
서울경신중학교를 거쳐 13년 「세브란스」약학과를 졸업. 이 옹이 기미독립선언의 33인 민족대표로 참가했을 때는 「세브란스」병원 약제주임으로 근무할 때였다.
연당의 회고에 의하면 그가 3·1운동에 참여하게된 것은 1918년이 저물어 가던 섣달 그믐께 당시 선천예수교 병원장이던 「로세·사락스」씨로부터 『지금 미국에서는 이승만 박사를 만국평화회의에 파견하는 등 독립운동이 한창인데 국내에서는 무엇을 하고 있느냐』는 말을 들은 것이 계기가 되었다.
이 말에 자극돼 그는 월남 이상재 선생, 의암 손병희 선생, 남강 이승훈 선생 등을 찾아다니며 독립운동에 참여할 것을 약속하고 다음해 최연소나이(31세)로 33인에 가담했다. 3·l운동 후 일경에 끌려가 3년의 옥고를 치렀던 이 옹은 일제 36년간 10여 차례에 걸친 감옥생활을 겪으면서 조국광복을 위한 불굴의 의지와 집념을 독립운동으로 폈다.
28년 「세브란스」간호학교부교장으로 재직할 때는 신간회 중앙이사로 우리민족 자립의 「민립대학」설립을 돕기 위해 전국 순회강연을 하다 체포돼 2년간 옥고를 치렀는가 하면 32년 신간회사건이 발각돼 상해로 망명했다. 이 기간 중 받은 일경으로부터의 심한 고문으로 이 옹은 뒷머리에 고질피부염과 저혈압·수전증을 얻어 평생동안 고생했다.
조국해방이후 이 옹이 펼친 활동은 신생 독립국을 반석 위에 올려놓고 후세인들에게 독립선언정신을 승계시켜 주는 것으로 일관됐다.
해방직후 결성된 독립촉성회의 회장직을 맡아 건국에 앞장섰고 이후 입법의원(47년), 제2대 국회의원(50). 국민회의최고위원(52년) 등 정계활동을 통해 광복후의 국가건설에 진력했다.
62년 정부는 그에게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줬다. 62년 정계에서 은퇴한 후에도 광복회회장직을 맡아 독립사상을 재조명하고 후인에게 고취시켜주는데 온갖 정성을 다했다. <안길모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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