칙악산 능선 길에|호랑이 발자국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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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2면

1천m가 넘는 강원도 산으로 제일 가까운 곳이 원주치악산이다.
지금은 많은 애산가들이 이산을 찾고 있지만 20년전에는 커회원(약10명)은 오후 늦게 해발 1천m고지에 있는 상원사에 도착했다. 뒤로 치악산(1천1백81m)과 남태봉(1천1백87m)사이로 남향받이의 아담한 절이다.
능선에는 눈이 30㎝가량 쌓여있었고 기온은 섭씨 영하12도였다.
자정을 기해 남태봉 정상 가까운 O지대를 골라 근사한「캠프·파이어」 의 의식을 마치고 일부는 눈 속에서 야영, 일부는 따뜻한 법당에서 첫 밤을 지냈다.
다음날 아침 일찍 조반을 끝내고 제2의 목적지 비로봉 (1,228m) , 그리고 그 산기슭에 있는 귀룡사를 향해 출발했다. 남태봉에서 비로봉까지 8km, 비로봉∼구룡사까지 6km, 모두 14km의 강행군이다.
그런데 간밤에 어두워서 못 봤던 능선 길에 호랑이의 발자국이 찍혀 있었다.
호랑이 발자국은 큰 주먹만한 자국이 일정한 간격을 두고 똑바로 한 줄로 찍혀 있는게 특징이다. 그리고 대개사람이 거닐 수 있는 길을 간다.
덕택으로 우리는 고생하지 않고 곧은재·창대봉, 그리고 비로봉을 지나 무사히 구룡사에 도착했다.
이날 밤 모두 스님 방에서 제2박을 하는데 자정이 가까 왔을 무렵 행자 한 분이 화장실로 가다 호랑이를 보고 기절초풍, 『호랑이야!』 하고 소란을 피우는 통에 잠에서 깼다.
「플래시」와 「피켈」을 들고 일행10명 돌격대가 방문을 차고 고함을 치면서 뛰어 나간즉, 호랑이는 그림자도 없다. 어딘가 숨은 모양인지. 젊은이들의 기백에 눌려 슬금 떠나가 버렸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플래시」로 살펴본 호랑이의 발자국은 절 안마당 부엌 앞까지 왔다 간 것이 틀림없었다.
『우리를 길 안내한 호형이 작별인사나 하러 왔군』하고 한바탕 웃고 깊은 잠에 들었다. 치악산과 호랑이는 우리 일행 전원에게 20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잊을 수 없는 즐거운 추억으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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