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 장수론 김주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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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예술과 인생이라는 문제는 매우 고색 창연한, 어떻게 보면 고리타분한 「테마」다. 인생은 짧지만 예술은 길다는 말과 같은 것이 그 진부함을 잘 나타내주는데 요즈음은 이 낡은 표어조차 그대로 통용되는 것 같지 않다. 사람들은 과연 예술의 수명이 그렇게 긴 것인지에 대해 회의하게 되었고, 그 회의를 제법 체계적으로 연구하는 학문이라고 할까, 방법론까지 생겨나게 되었다.
즉 예술이란 그것을 받아들이는 시대와 사람들에 따라서 그 가치판단이 언제나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이다. 이른바 수용미학이라는 관점이다. 이런 생각에 따르면 영원불멸의 대작이라든가, 불후의 명작이라는 초대형「슬로건」같은 것은 자연히 무색해질 수밖에 없다.
예술은 그렇지 않아도 또 어차피 그렇게 긴 것이 될 수 없다는 생각은 여기저기에서 터져 나온다. 예술이 뭐 별거냐, 혼자 고고한 체 해보아야 뭐하냐, 그때 그때의 시대와 현실을 잘 반영해야한다는 주장이다. 물론 새삼스러운 주장은 아니지만 예술 장수론에는 하나의 위협이 된다고 할 수도 있다. 현실, 즉 사회경제적인 그 시대의 특수성에 골몰하다 보면 몇 세대가 지난 뒤엔 지극히 제한된 풍경만을 전달해주는 결과가 되어 설득력과 현실감을 잃을지도 모를 위험을 전혀 기우라고만 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밖에도 예술의 장수를 막는 요인들은 많다. 예술이라는 이름으로 횡행하는 잡다한 통속물들은 예술의 건강을 염려하기에 앞서 과연 예술이란 무엇일수 있는가에 대한 근본적 회의를 먼저 가져오게 된다.
그러나 정말 짧은 인간의 일생을 예술을 통해 뛰어넘어 보려고 한 눈물겨운 노력도 우리는 얼마든지 기억한다. 많은 사람들이 눈물과 함께 뒤돌아보는 이중섭이나 박수근 같은 화가, 혹은 이상이나 김유정 같은 문학가들은 얼핏 손에 잡히는 이름들이다.
그 이름들과 더불어 나는 요즈음 독일의 시인「고트프리트·벤」을 곧잘 생각에 떠올린다. 1930년대의 어둡고 험한 독일을 살다간 그는 그 어려웠던 시대 속에서도 절대시, 혹은 정시라는 문학의 힘든 분야를 열고 여기에 도전하였다. 그를 이해하는 사람이 없지는 않았으나 많은 사람들의 몰이해 속에서 그는 외로이, 그러나 묵묵히 그 정신의 높은 지평을 향해 끊임없이 손을 뻗고, 발을 치켜든 시인이었다.
전쟁과 「나치」가 그의 삶을 할퀴고 지나갔으나 그는 언제나 시만을 생각하였다. 그러나 독일사람들은 전쟁이 끝났을 때 그를 가리켜 현실을 잊고 시만을 생각하는 사람이라고 비난하는 것 대신에 그에게 독일 최대의 문학상인 「뷰흐너」강의 영예를 씌워주었다.
정신을 존중할 줄 알았던 독일국민들에게는 아마도 예술이 정말 오래오래 장수할 수 있을 것이다.
사감도 그렇겠지만, 예술이 장수할 수 있는 길은 한가지에 꾸준히 정진하고, 그 길을 위해서는 결코 핑계를 대는 일이 없어야할 것이다. 하루 아침의 「조깅」이 건강을 가져다줄 수 없듯이 얼맛동안의 통속적 인기는 예술의 장수와 아무관계가 없다. 밖의 사정이 어떻게 돌아가든 광인처럼 버텨나가는 예인들의 사회에서만 예술장수론은 그럴법한 이야기가 될 것이다. <숙대 교수·독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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