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 사람] TG 우승주역 프로농구 최고령 현역 허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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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어느 시즌보다 극적이었던 프로농구 챔피언 결정전에서 지난해 우승팀 동양을 누르고 정상에 오른 TG 선수단은 지난 15일 이용태 TG삼보컴퓨터 그룹 회장을 방문했다. 구단.선수단 전원이 총수에게 우승 보고를 하는 자리였다.

李회장의 기쁨은 대단했다. 한창때 청년 기분으로 돌아간 72세의 李회장은 전창진 감독에게 '지혜와 덕을 모두 갖춰 부족함이 없다'는 뜻으로 '지덕겸전'(智德兼全)이라는 휘호를, 38세의 현역 최고령인 허재 선수에게는 '이루지 못하는 바가 없다'는 뜻으로 '무소불성'(無所不成)이라는 휘호를 선물했다.

특히 허재 선수에 대한 애정은 각별했다. "허군은 '30.40'의 희망"이라고 치켜세우는가 하면 은퇴 문제가 화제에 오르자 문득 "허군이 지금 나이가 몇이냐"고 묻고 "서른여덟"이라는 대답에 "이 사람아, 난 지금 일흔둘이야. 서른여덟이면 한창 땐데 무슨 나이가 많다는 거야"라며 현역 생활을 연장할 것을 요구하기도 했다.

李회장의 이 한마디가 최근 관심을 모으고 있는 허재 선수의 현역 은퇴 문제를 일단락지은 셈이었다. TG 고위층에서는 재빨리 움직였다. 허 선수의 용산고 4년 선배이기도 한 이홍선 구단주와 최형길 부단장은 플레잉 코치로 2년간 계약을 연장한다는 원칙에 합의했다. 이로써 허 선수는 2004~2005시즌에도 TG 유니폼을 입게 됐다.

구단이나 허 선수로서는 어려웠을 이 결정이 갖는 뜻은 각별하다. 매우 예민한 문제이기도 해서 프로농구 역사가 쌓일수록 인구에 회자될 것이다. 우선 허 선수는 한국 프로농구 선수의 정년을 만 40세까지로 연장시켰다.

여러 면에서 미국프로농구(NBA)의 수퍼스타 마이클 조던과 비교되는 허 선수에게 어울리는 기록이다. 조던은 17일 40세의 나이에 필라델피아에서 은퇴경기를 가졌다. 허 선수는 "후배들을 위해 '망가질' 준비가 돼 있습니다. 훌륭한 후배들이 저를 이길지도 모르죠. 기꺼이 목표가 되어 줄 생각입니다"라고 했다.

물론 그가 조던처럼 40세의 나이에 40득점을 하는 등의 대기록을 세우거나 다시 한번 소속팀의 우승에 주역이 된다는 보장은 없다. 그가 2002~2003시즌 챔피언 결정전에서 보여준 초인적 활약이 '백조의 노래'가 될 것이 확실해 보인다. 사실 여러 차례 한계에 도달한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그러나 적어도 폭발적인 인기라는 측면에서 허재 선수는 지난 플레이오프 시리즈를 통해 중앙대-기아 시절에 필적할 만한 제2의 전성기를 구가했다. 무엇이 그토록 팬들을 열광시켰을까. 그의 팬들은 여러 층으로 나뉜다.

중.고교 학생에서 40~50대 주부.직장인들까지-. 그 폭은 프로농구 선수들 가운데 가장 넓을 것이다. 하지만 '허재 신드롬'의 진원지는 분명 李회장이 지적한 대로 30~40대였다.

이들은 자신들과 비슷한 나이의 허 선수가 10년 이상 젊은 후배들을 상대로 최선을 다해 싸워 이기는 모습에 감동하고, 그가 느끼는 육체적.정신적 고통에 공감했다. 한국 스포츠에는 팬들이 감정이입이 되어 하나가 될 만큼 흡입력을 지닌 스타가 드물다.

'4전5기'를 이룩한 복싱 스타 홍수환씨가 그랬을까. 그를 만난 시각은 여섯시. 햇살이 기울 무렵이었다. 지는 태양은 그와 어울릴 듯했지만 허재 선수의 생각은 달랐다. 그의 가슴 속에서 태양은 늘 새로 떠오르고 그는 늘 출발점에 서 있다. 특유의 자신감은 변함없었다.

"농구에는 정년이 없습니다. 앞으로의 2년도 제게는 또 다른 전성기일 뿐입니다."

허진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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