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강호와 김상경, 그들은 진짜 형사였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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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하는 것 자체가 응징의 시작이다." 화성 연쇄 살인사건을 소재로 한 영화 '살인의 추억'이 탄생하게 된 배경은 주연 배우 김상경의 이 한 마디에 압축돼 있다. 화성 연쇄 살인은 1986년부터 6년간 경기 화성군 인근에서 일어난 열 차례에 걸친 부녀자 성폭행 살인 사건이다.

중학생부터 70대 노인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연령층의 여성들이 범인에게 강간당한 뒤 잔인하게 목졸려 죽었다.

알려진 바로는 이 수사에 동원된 경찰 병력만 연인원 1백80만여명이었고 조사받은 용의자만 3천명에 달했다고 한다. 그러나 범인은 아직도 잡히지 않은, 말 그대로 영구 미제 사건이다.

'살인의 추억'은 관객에게 '화성 사건의 범인이 왜 잡히지 않는지 한번쯤 생각해 봤느냐'는 익숙치 않은 질문을 던진다. 그렇다. 그렇게 애를 썼는데도 왜 잡지 못했을까. 형사들의 무능함 때문에? 미국의 FBI 같은 과학 수사 기법이 도입되기 전이라? 범인이 너무나 신출귀몰해서? 아니면 경찰서 정문이 자리를 잘못 잡아 부정탔기 때문에?

이 영화의 각본을 쓰고 연출을 한 봉준호 감독은 그 대답을 80년대라는 상황의 특수성에서 구한다. "시위 진압과 반정부 세력 타도에만 정신이 팔려 있던 5공화국 정권에게 화성 부녀자들의 죽음은 대수롭지 않았다.

상황이 연쇄 살인마를 잡기에 역부족인 시대였던 것이다." 이 영화는 작게는 정권이 외면한 피해자들에게 보내는 진혼곡이면서 크게는 현대사의 그늘과 치부를 잊지 말라는 메시지를 담은 일종의 각성제다.

*** 완성도 높은 스릴러

'살인의 추억'은 근래 보기 드문 수작이다. 무엇보다 코미디 일변도로 치닫는 최근 우리 영화계에 이런 진지함을 이만한 완성도로 풀어낸 영화가 등장했다는 점이 반갑다.

갓 벼린 칼날처럼 문제의식은 빛을 발하되 보는 사람의 심기를 불편하게 하지 않을 정도로 그 날카로움이 절제된 것도 이 영화를 관객에게 선뜻 권하고 싶은 요인이다. 다시 말해 거시(巨視)와 미시(微視) 두 편의 용량을 마치 저울로 단 듯 정확히 배분했다는 인상이다.

높은 완성도를 상당 부분 떠받치고 있는 것은 박두만(송강호)과 서태윤(김상경) 두 형사다. 영화 초반 둘의 성향은 마치 할리우드 버디 영화처럼 극과 극을 달린다.

화성 토박이 형사 두만은 용의자에게 "내 눈을 쳐다봐, 눈을!"하고 윽박지르는 '육감 우선의 법칙'을 신봉한다. 반면 서울에서 파견된 태윤은 "서류는 절대 거짓말 안 하거든요"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사는, '과학 수사 제일주의자'다.

물과 기름 같았던 이들은 '미치도록 잡고 싶었던'범인을 쫓는 그 기나긴 좌절과 울분의 세월을 거치면서 차차 서로 동화돼 간다.

소재와 화면 모두 어두워 자칫 칙칙한 범죄 스릴러로 오해받기 쉬운 이 영화에 재미를 한껏 불어넣는 것은 바로 이들이 부대끼며 하나가 돼가는 과정이다. 그 과정이 갖는 설득력이 이 영화를 굳건히 떠받치고 있는 기둥이다.

두만은 범인이 현장에서 문자 그대로 털끝 하나 남기지 않았다는 이유로 무모증(無毛症)환자를 찾아 목욕탕을 수십 차례 드나들고, 급기야는 점집까지 찾아간다. 두만의 '무대뽀 수사'를 비웃던 태윤도 나중에는 "목격자는 필요없어. 불 때까지 패면 돼"라는 식으로 변해간다.

두 배우의 연기는 형사 역의 리얼리티를 살린 정도가 아니라 화면과 배우가 거의 일체가 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이 영화의 형사들이 갖는 리얼리티와 그로 인한 드라마적 긴장, 그리고 자연스러운 웃음은 '인정 사정 볼 것 없다'(99년)에서 박중훈이 연기했던 우형사와도 비교할 만하다.

*** 박해일 캐릭터 불분명

옥에 티도 있다. 유력한 용의자 박현규(박해일)의 캐릭터가 불분명하다는 점이다. 봉감독은 "현규가 진범인지 무고한 사람인지 헷갈리게 만드는 것이 의도였다"고 말한다.

그러나 두 형사와 현규가 대치하는 마지막 터널 장면에서 현규의 복잡한 표정 연기를 완전히 이해할 관객은 많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이 영화는 96년 초연해 히트한 연극 '날 보러 와요'(연출 김광림)를 원작으로 했다. 25일 영화 개봉에 이어 5월 8일부터 6월 12일까지 동숭아트센터 동숭홀에서 '날 보러 와요'가 다시 상연된다. 15세 이상 관람가.

기선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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