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임해봉과의 도일 기념국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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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조치훈 명인은 일본에 건너가 18년 동안 수많은 바둑을 두었다. 공식·비공식 할 것 없이 어느 대국도 소홀히 하지 않았지만 62년 도일 기념국으로 둔 임해봉(당시6단)과의 대국 등 5번의 대국이 가장 인상에 남아있다고 말하고 있다. 중앙일보 동경 주재 김두겸 특파원이 직접 조 명인을 만나 들은 이들 대국을 조명인 자평기 형식으로 5회에 걸쳐 연재한다.【편집자 주】
임해봉 9단(당시 6단)과의 도일기념 대국은 나의 스승인「기따니」(목곡실) 선생의 문하생 1백단 돌파기념 대국 2국 중 하나로 이루어졌다.
이 대국은 지금 누가 『너의 바둑 중 가장 인상에 남는 바둑을 꼭 하나만 집어 말하라』고 한다면 서슴지 않고 말할 수 있는 잊을 수 없는 대국이다.
나는 이 바둑을 지금도 아주 잘둔 바둑이라 생각한다. 요즘도 가끔 그 내용을 떠올리고는 혼자 흐뭇해 할 때가 있다. 그동안 기보도 4∼5번이나 보았다.
임 9단과 시합이 있던 날은 내가 일본에 온 바로 다음날이었다. 지금 내가 가장 인상에 남는 대국이었다고 말하는 이유 중 하나는 일본에 와서 처음 갖는 대국이었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조연형과 함께「산께이·홀」에 가서 기념대국에 참석했는데 형의 무릎에 앉아 있다가 그만 잠이 들어버렸다.
그래서 대국 순서가 늦추어졌고 형은 나를 화장실로 데려가 찬물로 세수를 시켜가며 잠을 깨우느라 혼이 난 모양이다.
형에게 미안하지만 그때 내가 겨우 여섯살이었으니 천진한 탓으로 여겼으리라고도 생각된다.
어쨌든 바둑을 두기 시각하면서 나는 꽤 긴장했던 모양이다. 처음부터 바짝 정신을 차렸다. 상대가 당시 6단인 임해봉 선배였지만 5점을 놓고 두니 이길 것 같기도 했다.
임 선배로서는 아주 입장이 곤란한 한판이었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임 선배는 미세하게 국면을 이끌어가다 2집정도 져 주려고 했다는 느낌이 든다.
바둑내용을 좀 소개하겠다. 흑6과 8은 백을 굳혀 주는 악수였다. 흑10과 12는 3삼으로 귀를 굳히면 되지만 마냥 수세에만 몰리기 싫어 공격을 시도했다. 14수부터 20까지는 최선의 수 였다.
백은 21, 23을 썩 두고 싶지는 않았던 모양.
흑24∼백 39로 귀를 빼앗겼다. 얼른 보면 흑이 대 손해인 것같이 보이지만 흑으로서 불만이 없다.
이것은 사석작전이었는데 지금 생각해도 용케 두었다고 생각한다. 백41로 협공해 왔을 때또 사석 작전을 폈다. 흑14를 버리고 56으로 들어간 것인데 괜찮았다.
흑68까지 외세를 크게 키웠다. 이것은 귀에서 쉽게 처리할 수 있었지만 반발하여 크게 한번 싸워보자는 것.
백69. 여기에서 처음 속았다. 백71자리에 붙여 선수로 백61을 잡을 수 있었다. 흑86이 통렬한 수였다. 상변을 쑥밭으로 만들고 백4점이 91로 달아나지 않으면 안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이 바둑을 사실상 끝나게 한 흑 1백4의 수는 기억이 생생하다. 중앙과 변을 완전히 깨려는 백 103에 대해 정말 어떻게 해야할지 곰곰 생각했다. 1백4로 멋지게 막아냈다. 임 선배는 1백18수까지 두고 나서 돌을 놓았다.
이 바둑은 나의 일본에서의 바둑 수업에 큰 영향을 미친 한판이었다. 이기고 난 직후에는 그렇게 기쁘지 않았으나『나도 해낼 수 있다』는 용기를 불어넣어 주었던 것이다. 이점 나는 임 선배에게 가르침을 받은 은혜를 입었다. 나는 홋날 일본 기원 선수권 도전자 결정국에서 임 선배에게 이겨 그날 임 선배가 가르쳐 준 은혜를 갚았다.
이 대국이 끝나고 곧 나는「기따니」 선생 문하에 들어가 바둑을 배웠다. 11살 때 초단이 되기까지 나름대로 힘든 바둑 수업을 했다. 수업 중 나에게 가창 깊은 영향을 준 사람은「가또」(가등정부) 현9단이었다. 문하생 중「대장」이었던「가또」는 나를 엄하게 다루었다. 6점을 놓아도 번번이 졌다.
조금도 인정사정을 두지 않고 마구 몰아쳐 어떤 때는 화점에 모두 놓아도(9점) 안돼 화점 아닌 곳에까지 놓고(10점 이상)두었다. 지면 더 약이 올라 대들었다.
「가또」선배도 나중에『아무리 져도 굽히지 않고 눈물을 뚝뚝 떨어뜨리며 한번만 더 가르쳐 달라고「한판 더, 한판 더」하던 모습이 생각난다』고 했다.
지금 와서는 나는「가또」선배와 대결하면 거의 이긴다. 이상하게도 공격적인 그의 바둑이 맞서기 쉽게 생각되고 있다.
그러나 임 선배가 어린 나를 너무 심하게 다루지 않으려고 도일 첫 대국을 양보한 것이나,「가또」선배가 나를 그처럼 심하게 다룬 것이나 모두가 나를 위해 준 것으로 나는 그들에게 은혜를 입었다.「가또」선배에게는「프로」십걸전 결정전에서 이겨 은혜를 갚았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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