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득의 인생은 즐거워] 아들의 밤 문화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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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7호 30면

남편은 아내와 아들을 볼 때면 30년 전에 본 영화 ‘레이디호크’가 떠오른다. 영화 속에서 추기경은 질투에 눈이 멀어 자신이 사랑하는 여인 이자보와 그녀가 사랑하는 호위대장 나르바에게 마법을 건다. 낮에는 이자보가 매로 변하고, 밤이면 나르바가 늑대로 변해서 두 연인이 사람인 상태로는 영원히 만날 수 없도록 말이다. 아내와 아들도 마법의 주문에 걸린 연인처럼 둘 다 깨어있는 상태로는 서로 만나지 못한다. 아들이 잠들 때 아내는 깨어나고 아내가 자고 있을 때 아들은 활동한다.

아들의 밤은 아내의 낮보다 밝다. 아내가 잠든 밤에 아들은 깨어있다. 책을 읽고 시를 쓰고 음악을 듣는다. 화장실에 가고 부엌을 들락거린다. 새벽에는 라면을 끓여먹기도 한다. 커피도 내려 마신다. 노트북으로 영화나 스포츠 경기를 보고 게임을 한다. 그러느라 아들의 밤은 아내의 한낮보다 밝고 분주하다. 환한 아들의 밤은 화난 아내의 밤을 만든다.

그래도 한번 잠들면 깊게 자는 편인 아내에게 아들의 밤은 차라리 견딜만하다. 아내는 아들의 낮을 더 힘들어한다. 아내에게 그것은 일종의 고문이다. 여름 낮의 길이는, 긴 여름 낮 침대에 길게 누운 183cm 아들의 길이는. 그것은 아내의 신경을 가늘고 길게 잡아당긴다. 아홉 시쯤 남편이 퇴근해 돌아올 때까지.

남편이 손을 씻고 늦은 저녁을 먹기 위해 식탁에 앉자마자 아내는 붙들고 있던 끊어지기 직전의 신경을 한숨과 함께 풀어놓는다. 사람이라면 밤에 잠자고 낮에 활동하는 게 맞지 않는가. 기업에서도 밤에 일하는 사람에게 돈을 더 많이 주지 않느냐. 왜 그러겠는가? 당신 아들을 한번 봐라. 점점 몸이 마르고 야위지 않는가. 사람이 햇빛을 받아야지. 뱀파이어도 아니고 왜 햇빛을 싫어하는 거야. 밥도 별로 안 먹는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 달리기도 하고 땀을 흘려야 밥맛도 있지. 누굴 닮아 저렇게 운동을 싫어하는지 모르겠어요. 4학년인데 본격적인 취업준비도 해야 하는 거 아닌가. 남들은 1학년 때부터 한다던데. 이건 모두 아빠인 당신 책임이다. 아빠로서 아들에게 알아듣게 말을 해야 하는 것 아니냐.

남편은 아들을 변호해본다. 당신도 읽었을 거야, 황현산 선생의 『밤이 선생이다』. “낮에 잃은 것을, 밤이여 돌려다오.” 괴테의 파우스트를 인용하며 선생은 이렇게 썼어. “낮이 이성의 시간이라면 밤은 상상력의 시간이다. 낮이 사회적 자아의 세계라면 밤은 창조적 자아의 시간이다.” 그러니까 아들이 낮에 자고 밤에 깨어있는 것은 상상력의 시간을, 창조적 자아의 시간을 갖기 위함이다. 오직 밤에만 깨어나는 영감이 있다. 라디오에서도 오후 2시에 틀어주는 음악과 새벽 2시에 들려주는 노래가 다르지 않느냐. 아들은 새벽 2시의 노래 같은 사람이다. 밤과 낮은 서로 문법이 다르다. 그걸 인정해야 한다.

아내는 배신자 바라보는 눈으로 남편을 노려본다. 아내가 낮이고 아들이 밤이라면 남편은 저녁 같은 사람이다. 남편은 밤중에 아들에게 다가가 낮의 세계가 요청하는 말을 그러나 밤의 문법으로 전해주었다.

역시 효과가 있었다. 하루는 퇴근하고 집에 오니 아들이 잠을 자고 있는 것이다. 낮이 아니라 밤에. “이제 당신이 원하는 대로 되었네.”

그때다. 아들이 일어나 나오면서 인사한다. “아빠 오셨어요. 오늘따라 늦잠을 좀 잤네. 밥 안 먹어요?”



김상득 결혼정보회사 듀오의 기획부장이다. 눈물과 웃음이 꼬물꼬물 묻어나는 글을 쓰고 싶어한다. 『아내를 탐하다』 『슈슈』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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