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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집중식 불 관리 체계 유사시 초동진화 걸림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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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3면

올 봄에도 또 산불이 났다. 양양에 난 산불은 오래된 사찰과 문화 유산을 태워 전 국민이 안타까운 마음이다.

정부는 그동안 나름대로 최선의 대책을 세워왔다. 그러나 매년 많은 피해를 보고, 예산을 투자해도 산불이 반복된다면 대처 방식에 근본적인 문제가 있는 것 같다. 산불의 원인을 파악해 조금 더 과학적이고 체계적이며 종합적인 대책을 세워야 한다. 재해 방지를 위한 패러다임을 바꿀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불은 작은 불씨에서 시작한다. 초기에 끈다면 물이 조금만 있어도 되고, 전문가나 큰 장비가 없어도 된다. 다만 불이 난 그 근처에 물이 있어야 하고, 빨리 불을 끄는 것이 필요하다. 지금은 물과 장비를 중앙에 두고 불을 끄는 집중화 시스템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멀리서 불이 나거나 동시에 여러 군데에서 불이 나면 인력과 장비가 한정되어 초동 진화가 어렵다. 이러한 집중화된 불 관리 시스템의 문제점은 분산화된 시스템으로 보완하면 어느 정도 해결할 수 있다.

서울대의 버들골 잔디밭 밑에는 약 10t 정도의 빗물탱크가 있다. 댐에서 넘치는 물과 잔디밭에 떨어진 빗물을 모아 조경용수나 청소용수로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불이 날 것을 대비해 언제나 5t 이상의 물은 남겨 놓도록 되어 있다. 이 시설을 만든 뒤 담당자는 덜 불안해한다. 만약 근처에 불이 난다면 이전에는 멀리 있는 본부에서 물을 가져오느라 시간이 걸리는데 지금은 가까이서 물을 받을 수 있어 마치 비상금을 가진 것처럼 마음이 편하다는 것이다.

불을 끄는 것은 물이다. 따라서 불 관리와 물관리는 동시에 이뤄져야 한다. 최우선적으로 문화재가 있는 사찰에 도입하자. 즉 자체적으로 분산화된 물관리 시스템을 도입하는 것이다. 사찰보다 조금 높은 곳에 빗물이나 계곡물로 저류조를 만든 다음 비상시에는 위치에너지를 이용하여 무동력으로 물을 대 불을 끄도록 하는 것이다. 이러면 불이 났을 때 물이 없다거나, 소방 헬기가 안 온다고 발을 동동 구르지 않아도 될 것이다. 여기 모은 빗물은 평시에 환경 정화용이나 청소용 등 여러 가지 용도로 사용할 수 있다.

이를 확대해 산간지역 전체에 빗물탱크를 설치하자. 민가나 전략적으로 중요한 곳, 또는 상습 발화지점에는 조금 더 많이 설치하고, 조금 덜 중요한 곳은 적게 설치하면 된다. 그 다음 지역 내의 모든 빗물탱크의 현재 수위를 실시간으로 파악하고 관리하는 시스템을 설치하면 지역 주민은 물론 중앙 부서 모두가 현재 물탱크에 물이 얼마나 있는지를 파악하고 그에 따라 적절히 대응할 수 있다.

이것은 공상소설 같지만 현실적으로 이뤄지고 있다. 서울시는 이미 새로 짓는 건축물은 모두 홍수 방지와 물 절약 차원에서 빗물 저류조의 설치를 하고 수위를 감시하는 시스템을 세계 최초로 도입하고 있다. 모두 다 우리나라의 정보기술(IT) 인프라가 잘 구축된 덕분이다.

부가적인 이득으로 여름에 빗물탱크를 채우고, 비우고 하는 관리를 잘 하면 유역 전체의 홍수 방지 효과나 가뭄 방지 효과도 기대할 수 있다. 물론 약간의 문제점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를 해결하기 위해 공학이나 과학이 필요한 것이 아닌가.

현재의 집중형 불 관리 시스템을 분산형 시스템으로 보완하면 최대한의 효과를 낼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을 물관리 시스템과 연계해 활용한다면 더욱 시너지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 물과 불에 대한 비상금을 동시에 가지는 것과 마찬가지인 셈이다. 올해 배정된 산불 및 홍수 관련 예산의 1%만 들여서 한 지역을 정해 시범 사업을 실시하는 것을 제안한다. 지역 전체에 골고루 빗물 저장조를 설치해 물과 불의 연계 관리시스템을 구축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성과를 보아 전국에 확대하자. 그러면 앞으로 수십 년 동안은 산불과 홍수 걱정을 덜게 될 것이다.

한무영 서울대 빗물연구센터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