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0화 야구에 살다-33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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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남전야구「팀」의 활약이 미미한데다 전조선군으로 보름가량 합숙을 하는동안 이영민의「보스」 기질에 흠뻑 매료된 나는 식산은행으로 자리를 옮겼다. 이당시 실업「팀」은 일인들이 주축을 이루던 기존 5개「팀」외에 뜻이 맞는 야구인들은 「스폰서」만 있으면「팀」을 구성, 내가 식은에 들어간 9월엔 10여개「팀」으로 불어나 있었다.
이에 앞서 7월엔 이미 영성실업야구연맹이 결성되어 기념대회를 가졌는데 중앙실업이 결승에서 이해봄 제일먼저 창단된 계림구락부를 5-3으로 이겨 우승을 차지했다.
계림구락부는 1번노정호(좌익수) 2번정헌모 (3투수) 3번이영민 (포수) 4번손위준 (유격수) 5번유갈룡 (투수) 6번금봉강 (2루수) 7번박장환(1루수)8번정태용 (중견수) 9번박수돈(우익수) 등이 「스타팅· 멤버」였으며 중앙실업은 1번 나조화(우익수) 2번정인환 (좌익수) 3번금일배 (1루수) 4번홍병창(중견수) 5번오윤환 (투수) 6번박지환(3루수) 7번 정만화(유격수) 8번이규남 (포수) 9번금명배(2루수)등을 내세웠다.
이튿날 신문에는 『중앙의 오투수의 건투와 계림의 이포수의 강타가 이번 대회의 첨화라할수있다』 고 국찬했다. 식은으로 전직한후 9월중순부터 추계실업연맹전에 출전했는뎨 나는 난생처음 투수로 기용되어 감독겸 포수인 이영민과「배터리」를 이루었으며 우정호가 우익수였다.
나는 원래 일본에서 투수와 유격수는 한번도 해본적이 없었는데 이상하게도 모국에 와서 이 위치를 맡게 되었다.
그러나 나는 「와세다」 (조도전) 대 시절부터 연습때는 투수를 해왔기 매문에「컨트롤」에는 자신이 있었다.
그런데다 어깨가 좋아 직구에는「스피드」가 있었고「커브」도 잘 멱혀들어갔다. 결국 25일동안 19 「게임」 을 완투, 전승 우승을 차지하는 수훈을 세웠다. 이때 나는 4번타자로 투타에 걸쳐 마음것 활약했는데 지금 생각하면「와세다」대에서 닦은 철저한 기본기로 2년간의 공백에도 잘했던것같다.
그래서 나는 지금도 후배「코치」 들을 만나면 기본기에 충실한 야구를 가르치라고 충고한다. 이때 유일한 패배는 마산과의 친선경기에서 6-4로패한 것이다. 이 패배에는 연유가 있는데 10월1일 대구에서 좌익계 폭동이 일어났다.
마산과의 친선경기가 벌어지는날 식은의 좌익들은 은행정문을 걸어잠그고 궐기대희를 가지려고했다.
그래서 간신히 회사를 빠져나와 운동장에 도착한것이 경기시각 시간보다 1시간이나 늦었으니 경기를 이길 수 없었다.
이해 제27회 전국체전이 서울서 벌어졌는뎨 식은에선 나더러 서울대표로 나가라고 권유했으나 고향인 전주대표로 출전했다. 결승에서 전주는 광주와 대결, 6회까지 6-4로「리드」했는데 광주가 심판판정에 불복하고 기권하는 바람에 기록장으로 9-0이 되어 기권우승을 차지했다.
그런데 이듬해인 47년 봄부터 식은에서의 야구선수생활이 상당히 어려워졌다. 나는 이때 전주지점에 근무하면서 대회때마다 상경, 경기를 벌였는뎨 지점장이 이를 허락하지 않는것이었다. 식은은 원래「엘리트」의식이 강하고 보수적인 은행이어서 일과 야구의 병행은 어려웠었다.
그래서 거의 야구를 못하고 전주배중을 가르치는 일로 소일했다. 그러자 이해가을 야구광인 김융조<전연합회 (농협전신) 하재용부회장(하영기 현산은 총재의숙부) 이 나를 만나자더니 대뜸 금련으로 와서 야구를 계속하라는 얘기를 했다. 나는 하는것은 좋지만 또 직장을 옮겨야하는 문제에 부딪쳐 상당히 고민을 했다l
이당시는 과도기 이기도 하지만 야구인들은 조그만 이해관계에 얽혀 한해에도 두 세차례씩「팀」 을 옮겨다니는 일이 유행병처럼 만연해 있었다. 나는결국 금련으로 옮길뜻을 굳히고 부친께 얘기를 했더니 『야구를 한다고 직장을 바꾸는 것은 좋지않다. 당장 춥겠지만 앞으로 운동을 그만두면 얼마나 손해가 크겠느냐』 고 충고를했다. 그러나 식은에서는 야구를 계속할수 없는 환경때문에 금련으로 옮기고 말았다.
이후 나는 부친의 층고를 항상 명심해서 60년대 야구「붐」이 일때 여러 「팀」 에서 좋은조건으로 감독으로 오라는 교섭이 왔을때도 모두 거절, 농협에서 30년을 근무한뒤 정년퇴직한것을 자랑으로 삼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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