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력투쟁의 불씨는 아직도…|조자양의 새 중공, 무엇이 문제인가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3면

중공은 10일 끝난 전인대를 통해 중공은 물론 국제정세의 동향에도 깊은 영향을 미치게될 경제발전을 지상목표로 하는 새로운 체제를 확정했다. 수삼 조자양이 선출되는 등 국무원의 인사가 대규모로 개편되고 경제개혁방안에 자본주의의 냄새를 다소 풍기는 일종의 혼합경제방식이 도입된 배경은 권력투쟁과 현실경제의 위기가 복합적으로 얽혀있다. 이 전인대의 결과는 등소평의 3개년에 걸친 끈질기고 교묘한 책략의 소산이라고 보면 된다.
중공도처에 거지들이 방황하고 10억의 인구 중10%를 차지하는 1억의 인구가 반 기아상태에 허덕이고 수천만명의 젊은이들이 실업상태에 있는데도 중공의 지도자들은「10개의 대경유전 건설」이니「농업은 대채에서 배우자」라는 허황한 구호를 일관했다.
등은 삥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해서는 이와 같이 주로 채찍을 휘두르는 지도층의 개편 없이는 불가능하다고 보고 한때의 화적밀월관계를 깨버리기로 했다는 것이「홍콩」관측통들의 견해.
등은 휘하의 실권파를 동원하여 과감한 정책을 시행하게 하는 한편 문혁파의 비정을 파헤치기 시작했다. 실권파는「실천이 진리를 검증하는 유일한 기준」이라는 기치를 내걸고 이미 실천을 통해 수상 화국봉의 모택동 추종노선이 진리가 아니라는 것을 하나씩하나씩 검증했다. 농업정책의 실패추궁, 9개년(77∼85년)경제개혁의 수정, 자력갱생원칙의 표기 등으로 이어지면서 양파껍질을 벗기듯 그에 관련된 지도층에 포격을 가했다.
그런 한편 등은 자파 세력을 지도층 상층부에 박아 나갔다. 그 장점이 연초부터 가열된 개인숭배사상에 대한 통렬한 공격이었다.
모가 현대의 신이 아니며 누구나와 같이 결함을 가진 인간이라는「미신타파」의 논의는 결국천안문에 걸려있던 모의초상을 끌어내리게 했다.
모택동 초상 철거의 진짜 의미는 화의 초상을 처치하는데 있었음은 물론이다.
이번 전인대에서 화가중공사상 처음으로 평화적으로 조자양에게 수상직을 물려줘 새 전통을 세웠다고 일부에서는 말한다.
그러나 모도 59년 유소기에게 국가주석직을 평화적으로 물려주고 2선으로 물러났던 역사를 주목해야 한다. 모는 당시 인민공사운동 등 3면 홍기정책의 실패로 지도층의 압력을 받고 화와 마찬가지로 권력의 2선으로 은퇴해 울분을 삭이고있었다.
실정의 책임을 따지는 온건파의 압력에 못이겨 자리를 물러났기 때문에 모가 권토중내를 위한 칼을 갈고 있다가 문혁을 발동했던 것처럼 화도 편한 마음일리는 없다. 따라서 실권파는 이런 역사적 경험의 희생자들이기 때문에 이번에는 정책의 전환과 권력구조와 지도층의 대 개조를 용의주도하게 오랜 기간에 걸쳐 철저하게 진행해왔다.
그러나 당 상층부에는 아직도 실권파를 견제하는 세력이 있고 국민과 군부, 그리고 관료사회의 기반조직에는 깊고·넓게 뿌리 박힌 모택동의 추종자들이 있기 때문에 실권파는 이번에 마련된 새경제정책의 강행을 통해 빠른 시일 안에 그 혜택을 국민들에게 골고루 나누어주고 그 결과로 국민적 기반을 확고하게 닦아야 할 시급한 상황에 있다.
따라서 실권파는 조자양을 중심으로 경제성장의 효율을 위해서라면 지금 채택된 정책보다 한발 앞서는 자본주의의 정책을 도입할 가능성이 크고 또 미·일과의 협력체제를 한층 강화할 것으로 보인다고「홍콩」의 한 좌익계인사는 전망했다.
그런 결과는 한반도 정세에도 필연적으로 영향을 미치게 돼 중공과 한국간에는 가까운 장래에 엷은 교류나마 이루어질 가능성이 있다고 어 인사는 내다봤다.
화는 수상으로서 마지막 연설에서『만인은 법 앞에 평등하다는 인식을 받아들여야 한다』 고 강조하면서 중공은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국민의 생활개선에 정책의 주안점을 두어야할 것이라고 역설했는데 이것은 중공의 새로운 사회로의 지향점을 시사하기도 한 것이기만 실권파에 대한 무서운 경고일수도 있다. 【홍콩=이수근특파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