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익활동·한민통 조직 시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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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육군본부계엄보통군법회의(재관장 문응직소장)는 19일 상오10시 「김대중등 내란음모사건」 3회공판을 열고 김대중등 13명의 관련피고인의 내란음모혐의에 대한 심리에 들어갔다.
관련피고인 13명이 출정한 가운데 진행된 공판에서 김대중피고인은 76년3윌1일 명동성당에서의 「민주구국선언문」을 발표한 사실과 국민연합공동의장에 취임한 사실, 10·26사건이후 사조직으로 예춘호가 중심이돼 구성된 비서실, 계문영이 주도하는 정책연구실, 장남 김홍일이 만든 「민주연합청년동지회」등을 조직운영하고 정치자금 2억4천7백만원을 모금한 후 그중 1억원을 사조직활동자금으로 썼다면서 검찰관의 직접 신문에 공소사실을 대부분 시인했다고 이날 공판개정직후 법무사는 『국가보안법·반공법·외환관리법위반 혐의로 분리 신문했던 김대중피고인을 내란음모부분에 관련된 다른 12명과 병합 심리한다』고 고지한 뒤 검찰관 직접 신문에 들어갔다.
법정에는 40여명이 공판을 방청했다.
이에 앞서 재판부는 18일 하오 7시25분까지 6차례나 휴정을 거듭하면서 김대중피고인의 국가보안법·반공법·외국환관리법위반부분에 대한 사실심리를 모두 끝냈다.
김대중피고인은 18일의 2회공판에서 담당변호인 허경만변호사가 한민통 결성배경·피고인과의 관계등을 물은데 대해 1시간에 걸쳐 이를 설명했다. 김피고인은 자신의 효과적인 해외활동을 위해 73년7월6일 한민통미국본부를 결성했으며, 일본본부결성을 위해 김재화 배동호 조활준 정재전등 민단비주류들과 상의한 일은 있으나 발기대회 전인 73년8월8일 귀국했다고 진술했다.
김피고인은 『해방직후인 45년9월 남노당선전책인 임영춘의 권유로 건준목포지부에 가입, 선전부원으로 활동했으며 후에 공산당·인민당과 합쳐 남노당이 된 신민당 목포시당위원장이며 남노당부위원장으로 암약하다가 행방불명이 된 이채현의 권유로 신민당에 입당. 조직부장으로 활동했었다』고 해방직후 좌익활동에 관여했음을 시인했다.
이어 79년8월초 「우쓰느미야·도꾸마」 일본중의원으로부터 일화 2O만「엔」을 받은 사실과 재미처남 이성호로부터 지난4월 1만「달러」를 받아 신고치 않고 있다가 압수됐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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