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김형경의 남자를 위하여

남자가 통과하는 폐허의 시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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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김형경
소설가

“지구는 좌절의 별이다. 불운이 겹치고 운명에 할퀴고, 이 사람에 속고 저 사람에게 걸려 넘어지는 것이 우리네 삶이다. 좌절하고 비웃음거리가 되고, 경쟁에서 늘 뒤처지는 것이 우리의 운명이다.”

 독일 언론인 볼프 슈나이더의 『위대한 패배자』라는 책은 이렇게 시작된다. 저자는 골리앗부터 닉슨 대통령까지 역사상 패배자로 분류될 만한 인물들의 삶을 소개한다. “종(種)으로서의 인간은 진화의 무수한 굴곡을 넘어온 고독한 승자지만 개인으로서 인간은 모두 실패하고 좌절한 사람들에 가깝다”고 정의한다.

 그의 정의는 심리적으로도 진실이다. 사춘기 이전 사내아이에게 꿈이 무어냐고 물으면 대통령이라고 말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소방관이나 스파이더맨처럼 자기 눈에 영웅으로 보이는 이를 꿈꾸며 그와 같은 사람이 되고자 한다. 그 시기 아이들은 영웅을 흉내내면서 자기 정체성을 만들어간다. 청춘기를 지나며 남자들은 꿈을 조정한다. 현실을 인식하면서 영웅을 포기하거나 마음에 들지 않는 세상을 뜯어고치려 한다. 그 패기와 자신감은 근거 없는 낙관주의에 뿌리를 둔 경우가 많다. 직장에서 일하는 삼십 대 남자들은 다시 꿈을 조정한다. 삶이 자기 뜻대로 풀려나가지 않는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면서 나르시시즘을 넘어서고 보다 현실감각을 가진 사람이 된다.

 남자가 지나는 삶의 발달 단계마다 좌절과 폐허의 시간이 찾아온다. 사춘기 반항과 청춘기 방황은 예전의 꿈을 포기하고 새로운 삶의 방식을 받아들여야 하는 어려움의 결과다. 그중 남자가 가장 극적으로 폐허를 경험하는 시기는 중년기다. 그곳은 꿈을 최종적으로 포기해야 하는 지점이며, 꿈이 성취된 후의 허탈감과 만나는 곳이다. “여기까지만 오면 될 줄 알았는데….” 맥빠진 목소리로 중얼거리는 이들은 그토록 성공하고자 했던 이유가 무의식에 있는 결핍감 때문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릴 때까지 좌절을 넘어서지 못한다. 발달 단계의 좌절이든, 현실에서의 패배든 남자가 경험하는 폐허의 시간은 소중한 경험이 된다. 마음이 낮고 어두운 곳에 머무는 시간들을 지나면서 남자는 비로소 겸허하고 강인하며, 공감할 줄 아는 사람이 된다.

  책은 이렇게 마무리된다. “우리는 승 자를 경탄하면서도 시기한다. 우리가 연민을 느끼고 공감하는 이들은 실패하거나 승리를 사기 당한 사람들이다. 어떤 시련이 닥쳐도 밝은 표정으로 감내하는 이들에게 갈채를 보낸다. 착한 패배자란 혹시 ‘이상할 정도로 고상한 성품의 소유자’가 아닐까.”

김형경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