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시대」는 올 것인가|독-불 정상 회담의 결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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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지스카르-데스탱」 「프랑스」 대통령이 서독을 방문해 이루어진 독·불 수뇌 회담은 『「유럽」 시대의 예고』같 은 느낌을 주는 상징적인 모임이었다.
미국의 지도력이 떨어지고 있는 반면 상대적으로 소련의 군사력이 증강되는 가운데 미국에 대소 방위을 의존해온 서구 국가들은 이제 자체 역량을 키워야 한다는 절박한 「감」을 잡고 있는 듯하다. 미국이 소련에 비해 군사력 면에서 절대적 우위를 차지하고 있었을 때는 미국의 정책이 바로 「유럽」의 정책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었으나 이제는 그러한 일방적인 관계를 하나씩 정리해나가야 할 시기가 될 것으로 「유럽」 사람들은 생각하고 있다.
그런 면에서 「유럽」 대륙의 두 주도 세력인 서독·「프랑스」 수뇌의 회동은 대미·대소 관계를 재조정하려는 단계적인 노력의 하나로 볼 수 있다. 더우기 최근의 「이란」·「아프가니스탄」 사태에서 드러난 미군사력의 한계와 「카터」 행정부의 정책은 「유럽」사람들의 눈에 위태롭고 불안한 것으로 비쳐졌다.
미·소의 군사력이 가장 날카롭게 대치하고 있는 「유럽」 국가들은 한편으로는 미국의 군사력을 대소 억지력으로, 다른 한편으로는 소련과의 화해를 바탕으로 안정을 추구해왔다.
최근까지만 해도 미국과 「유럽」은 이런 면에서 이해가 일치해 대소 정책면에서 두드러진 마찰이 없었다. 그러나 「아프가니스탄」 사태 이후 미국이 취하고 있는 강경한 대소 정책은 서구 국가들, 그중에서도 특히 서독과 「프랑스」에 큰불만을 줘왔다.
미국이 실제로 소련을 압도할 능력이 없으면서 대소 화해 정책을 포기하는 것은 자위 행위나 다름없다는 것이 두 나라 지도자들의 생각인 것 같다.
그래서 불·독 지도자들은 미국의 거북살스러운 눈길을 의식하면서도 「브레즈네프」 소련 공산당 서기장과 직접 대화를 갖고 동서 화해를 되살리려는 중재자를 자처하고 나선 것이다. 그러나 강력한 미국의 압력에서 벗어나 자기네 입장을 내세우고 소련에 대해서도 대등한 입장에서 대화를 계속하려면 「유럽」 자체가 그만한 힘을 갖추는 것이 전제가 될 수밖에 없다. 그러기 위해서는 「유럽」 자체의 군사 협력을 강화하고 정책면에서 서로 이해를 두텁게 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미 미국이 개발을 보류한 중성자탄을 「프랑스」가 83년까지 자체 개발하겠다는 정책을 내세운 것이라든가 「프랑스」가 서독제 「탱크」 구입을 검토하는 것은 이러한 맥락에서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런 면에서 두 나라 수뇌가 대소 핵 저지력을 갖추는데 협조하기로 한 것도 이번 회담의 성격을 잘 드러내 주고있다.
대소 정책면에서 또 하나 중요한 것은 「브레즈네프」 소련 공산당 서기장이 두 지도자들에게 보여주었던 화해 「제스처」의 진의가 무엇인지 검토했다는데 있다. 소련과 화해 정책을 펴는 두 나라에 대해 초조한 눈길을 던지는 미국의 불안을 씻어주기 위해서도 화해의 한계를 명확히 해둘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서독이 「프랑스」에 비해 훨씬 신중했던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미국 및 NATO와의 관계에서 비교적 자유로운 입장인 「프랑스」에 비해 미국의 핵 전력에 거의 의존하고 있는 서독은 미국의 영향력을 배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번 독·불 정상 회담은 「유럽」의 탈미 신시대를 향한 준비 단계이지 본격적인 「유럽」 시대의 도래로 보기에는 아직 성급하다고 해야할 것 같다. 【본=이근량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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