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과거 청산하면 인도적 대우하겠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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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사이공」시「콩리」가 1백89번지 2층집 현관 앞에서 차는 멈추고, 우리들 일행은 내렸다. 이 건물은「티우」 정권 때 「인도네시아」 총영사관이었던 아담한 2충 집이다. 현관을 들어서니 왼쪽 넓은 「살롱」에 엷은 초록색 「아오자이」를 입은 스무살 남짓한 여자가 서있었다. 월공 고위관리가 있는 곳이라 이렇게 아름다운 여비서가 배치되었구나 하고 생각했다. 나를 기다리는 월공 고위관리는 누구일까?
꽤 높은 직위를 가진 간부임에는 틀림없을 것이다. 이렇게 상상하며, 나는 광대뼈 보좌관인 경찰중위와, 경찰하사관의 호위를 받으며 계단을 올라가 2층 방문 앞에 섰다.
경찰중위는 문을 열었다. 나는 방안에 들어서면서 7m쯤 떨어져있는 곳에 책상을 앞에 놓고 나란히 앉아있는 두 사람을 보았다. 분명히 월남인은 아니었다.
감색에 가까운 하늘색「넥타이」를 매고, 엷은 하늘색「와이셔츠」에 검은색 또는 짙은 흑회색 양복 상 하의를 입고 있는 자는 생김새가 김일성과 비슷하며 분명한 북괴요원이었다. 그 옆에 흰 「노타이」「셔츠」를 입고있는 자도 생김새가 북괴요원이었다. 경찰중위는 북괴요원들로부터 약간의 거리를 두고 3m반쯤 떨어진 곳에 놓여진 초라한 의자에 나를 앉힌 후 밖으로 나갔다. 북괴요원들은 안경너머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으나 쉽게 말문을 열지 않았다.
북한괴뢰정권 공작요원.
이들은 「사이공」 침략 후, 우리 잔류 한국인들을 괴롭혔다. 1975년 6월부터 재월 잔류 한국인들에게 손을 대기시작, 8월19일까지에는 몇 명의 한국인을 접촉하고 9월23일에는 「치화」형무소에서 서 영사를 심문하고, 9월22일에는 안 영사·김종옥·이 장관을 심문하고, 9월24일에는「에덴·아파트」6층에서 강서신을 심문하고 9월26일부터 내가 체포되는 10월3일까지에는 「매저스틱·호텔」5백2호실과 5백3호실에서 유남성 이하 여러 명을 심문했다.
그들은 심문할 때 한국의 교관에게도 너, 야, 자, 해가며 반말로 공갈·협박·회유를 했으며, 공갈·협박·회유에 말려들어 실수한 사람들도 있었다. 늘 말로만 듣고 미워하던 그 북괴요원들이 오늘은 내 눈앞에 나타난 것이다. 옷차림이나 앉아있는 좌석으로 보아 김일성을 닮은 자가 선임자였다. 나를 한참동안 바라보던 북괴요원 선임자는 입을 열었다. 『북반부에서 왔시다.』 황해도 사투리로 들렸다. 나는「북반부」를 「국방부」로 잘못 들었다.
『네? 어느 나라 국방부입니까?』『북반부에서 왔시다. 북반부요]나는 또 못 알아들었다.
『어느 나라 국방부지요?』
『평양에서 왔시다』 하고 북괴선임자는 언성을 높였다.『그럼 당신들 성함이 무엇이며, 어디서 일하는 사람들인지 말해주시오. 나는 국제법의보호를 받는 외교관입니다]
북괴요원 선임자는 잠시 생각하다가, 『평양에서 온걸 몰라서 그러오. 평양에서 왔어요』하고 그 이상을 설명하지 않았다. 그는 곧이어 언성을 가다듬으며 말하였다.
『당신은 제2차 세계대전 후 전범들이 어떻게 처형당했다는 것을 잘 알 것이요. 당신의 처리문제를 왯남(월남) 정부는 전적으로 우리 손에 일임했소. 당신이 지금부터 과거를 깨끗이 청산하고 우리 인민 편에 서서 일한다면 관대히 용서하고 인도적 대우를 해주겠소.』
나는,『아니, 내가 당신들에게 과거를 깨끗이 청산하고 대한민국 편에 서서 일을 하면 관대히 용서하고 인도적 대우를 해주겠소 하면, 당신들은 전향하겠소?』
똑같은 이유로서 나는 안 하겠소 그리고 나는「유엔」이 제정한「빈」협정에 의하여 치외법권을 갖는 외교관이요. 당신들의 심문에 답변할 의무가 없소』하였다.
『우리가 언제 전향하라는 말을 했소. 당신은 객관성을 잃고 왜 주관적으로만 말을 하오.』횐「노타이·셔츠」입은 자가 최초로 입을 열었다.
『과거를 청산하고 인민 편에 서서 일하라는 것이 전향이지 뭐요. 그런 유치한 말은 하지 마시오. 나는 더 이상 말하지 않겠소』하고 오른손을 내저었다.
『「빈」협정은 선량한 외교관만 보호하라는 것이지, 당신 같이 이리가 양의 탈을 쓴 가짜외교관은 보호하지 말라고 되어 있소]
횐「노타이·셔츠」입은 자가 또 말했다.
『왜 자꾸 말을 시키는 거요. 이번만 말하고 일체 하지 않겠소. 아니「빈」협정 몇 조 몇 항에 그런 것이 써 있소. 그런 어린애 같은 유치한소리는 마시소.』
북괴요원들은 잠시 말없이 있다가 선임요원이 부드럽게 말하였다.
『피는 물보다 진다는 말이 있소. 우리는 같은 조상의 피를 이어받은 동족이오. 우리 한번 동족으로서 이야기해봅시다.』
『왜 자꾸 이야기하게끔 만드시오.
이번만 말하고 무슨 일이 있어도 나는 말하지 않겠소. 아니, 그래 나의 처리문제를 전적으로 일임 받을 정도로 월남정부와 친하다면서, 불법으로 구속되어 3년 간이나 갖은 고생을 하면서 옥고를 치르고있는, 피가 섞인 동족을, 석방시켜달라는 말은 한마디도 않고 이제 와서 과거를 깨끗이 청산하면 관대히 인도주의적 대우를 해주느니 뭐니, 그따위 모순된 말이 어디 있소.』
『이쌔끼!』김일성 닮은 자는 꽥 소리를 질렀다.
『야, 이쌔끼야. 얻다대고 이 새끼라는 거야』
나는 맞섰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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