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이용사30여명 30년을 병상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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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한국전쟁이 일어난지 30돌. 30년간 병상에서 전상(전상)을 달래는 전쟁상이자들에게는「6·25의 비극」이 과거의 일이 아니라 아직도「현실」이다.
6·25 30돌인 25일 국립원호병원 (원장정호용·55·서울구로구궁동198)에 입원중인 6·25상이용사들은 그날의 비극을 되뇌며 감회에 젖었다. 국립원호병원에만 30년병상의 상이자가 3O여명이나 된다.
『6·25의 비극은 겪어보지 못한 젊은 세대에선 실감이 잘가지 않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와같은 참전상이용사들이 살아있는한 6·25는 이땅에서 아직엄연한 현실입니다.』
국립원호병원2충202호실―. 당시 20대로 각각 군과 경찰에서 전쟁의 참상을 겪고 그상흔을 간직한 백현일 (55·인천시남구문석동주공「아파트」42동401호)·안효문(57·동「아파트」10동205호) 씨는 25일아침 자리를 나란히한 병상에서 이렇게 입을모아 말한다.
당시 간부후보생으로 훈련을 받던중 참전, 전쟁첫 해인 50년9월 경북영천전투에서 부상한 백씨 (당시6사단 19연대1중대장)는 그때를 이렇게 회상한다.
백씨가 첫전투에 참가한것은 그해7월초 간부후보생 교육 1개월도 채안된 몸으로 소위로 임관돼 경북점촌에 사령부를 둔 제6사단에 배속되면서부터였다.
「탱크」를 앞세우고 밀물처럼 쳐내려오는 북괴군을 맞아 아군은 보잘것 없는 장비였지만 의성·영천등지에서 격전을 벌였다.
백씨는 당시 우리군이 병력과 무기가 훨씬 열세한 속에서도 오직『조국을 지켜야한다』는 일념에서 모두들 잘 싸웠다고 했다.
50년9월20일쯤. 경주 북방 10㎞지점에서 적과 교전을 벌이던중 적의 포탄파펀이 철모아래 왼쪽눈밑을 뚫고 뇌에 박히는 중상을 입었다.
백씨는 바로 부산으로후송돼 치료를 받고 그후 상처가 다소 아물었으나 지금까지 뇌막에 박힌 파편을 제거하지 못한채 병상을 지키는 몸이됐다.
『당시 서울의 현 육본자리에서 함께 교육을 받았던 50여명의 간부후보생 동기들이 전쟁기간 10여명이나 전사했읍니다.』
6·25의 참화는 백씨에게 누구보다도 큰 상처를 남겼다.
백씨와 똑같이 지난 30년간 병상을 떠나지 못했던 안씨는 6·25때 인천경찰서 정보과형사였다.
46년 경찰에 투신해 한국전쟁이터지기 직전까지 2년간이나 이승만대통령의 사저경호경비를 맡았었던 안씨는 피난길에 공산주의자들로부터 무차별총격을받고 왼쪽다리가 벌집이 됐다.
대전교도소에 수감됐다가 괴뢰군에의해 풀려나온 공산주의자중 1명이 50년7월 충남당진에서 피난길에 나선 안씨를 알아보고 총격을 가했던것.
당시 극적으로 생명은건졌으나 안씨는 그후 부상한 다리를 6번이나 복개하는 대수술을 받았다.
『6·25는 잊어서는 안될 민족의 비극입니다. 조국의 운명이 그처럼 결정지어졌던 모든 요인들을 돌이켜보고 오늘의 자세를 바로 잡아야 합니다.』
백·안씨는 때로는 무분별하게까지 보이는 오늘의 젊은세대 가치관과 행동을 지적하며 2O대의 몸으로 겪었던 6·25 당시 자신들의 비극을 회상했다. <이창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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