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白球와 함께한 60年] (12) 관심모은 영호남 라이벌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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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프로야구 원년부터 호남의 해태와 영남의 삼성이 맞붙는 경기는 늘 뜨거운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특히 당시는 5공화국 때였으므로 정치적 긴장관계가 맞물려서 삼성이 광주에서 경기를 하거나 해태가 대구에서 경기를 하는 것은 단순한 프로야구 게임 이상의 의미를 갖고 있었다.

사람들이 모이는 곳에는 언제나 기관원의 감시가 뒤따랐다. 혹시나 정치적 집회로 번질까 두려워서였다. 당시 사회적 분위기가 그랬다.

3월 27일 동대문구장에서 역사적인 개막전을 치른 프로야구는 개막전에서 이종도(MBC)의 끝내기 만루홈런이 터지며 순탄하게 인기몰이를 해갔다.

그러던 어느 날, 4월 중순쯤으로 기억한다. 안기부 관계자에게서 연락이 왔다. 그는 "프로야구 일정을 보니 오는 5월 15,16일 광주에서 해태와 삼성의 경기가 있는데, 그 경기는 다른 날짜로 바꾸든지, 아니면 빼든지 해야겠습니다"라고 말했다.

뚱딴지 같은 소리에 나는 자초지종부터 알아야 했다. "도대체 왜 그렇게 해야 됩니까?"라고 물었다. 그는 "확실하진 않지만 뭔가 불미스런 일이 생길지도 모릅니다. 5.18을 며칠 앞두고 광주의 분위기가 험악하게 번질 가능성이 있어요"라고 말했다.

나는 "그게 무슨 말입니까. 스포츠 경기는 페어플레이와 규칙 준수에 그 기본이 있습니다. 정해진 일정이 엄연히 있는데 이제 와서 그걸 바꾸자면 리그 전체가 흔들리게 됩니다"라며 바꿀 수 없다고 맞섰다.

그로부터 며칠 뒤, 이번에는 청와대 쪽에서 연락이 왔다. 조규향 체육담당비서관이었다. 그는 "내일 청와대에서 만납시다.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라고 했다.

다음날 청와대에서 그를 만났더니 "이 총장님, 5월 15, 16일 광주경기 때 전국의 운동권 세력이 야구장에 모인다는 소문이 있습니다. 아무래도 경기 일정을 바꿔주셔야겠습니다" 라고 말했다.

경기 열흘을 앞둔 5월초까지 청와대와 안기부는 "아무래도 그 경기는 안된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나는 서종철 총재에게 이 사실을 보고하고 "정치적 이유로 프로야구의 근간이 흔들려서는 안됩니다"라고 말했다.

서총재는 과묵하신 분이었다. 그는 "알았어요"라고만 대답하고 돌아섰다. 며칠 뒤 서총재는 나를 불러 "나랑 광주에 이틀간 같이 갑시다"라고 말했다.

경기를 그대로 치르기로 했으니 직접 가서 경기장 현장 지휘를 책임지자는 말이었다. 서총재는 그동안 고위 관계자들과 접촉해서 경기 강행 허락을 얻어냈던 것이다.

이틀간 양팀은 1승1패를 기록했고 1만4천여명의 관중이 모여들었지만 우려했던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오히려 명승부만 펼쳐졌을 뿐이다.

이용일(前 한국 야구위원회 사무총장)
정리=이태일 야구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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