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 포럼] 계좌추적 경쟁 시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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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우리는 돈의 속성을 잘 안다. 얼굴을 드러내기 싫어한다. 장롱 속에 쌓아둘 수도 없는 일이다. 돈은 사람과 사람 사이를 오가며 고수익, 저위험을 좇아 끝없이 흘러다닌다. 1998년 외환위기 때 은행들은 얼굴을 가린 돈뭉치를 들어오는 대로 받아들였다.

외환 부족에 시달린 정부가 원화로 예치되는 거액의 달러에 대해서도 출처를 묻지 않기로 했다. 그땐 몇십만달러를 들고온 예금주의 정체를 밝히라든가, 돈의 흐름을 따지자고 덤벼드는 건 시장의 혼란을 더욱 부채질하는 부질없는 일이었다.

그보다 훨씬 앞서 5공 군사정권 초기의 일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이철희.장영자 어음 사기사건 때 비자금 거래를 원천적으로 봉쇄하기 위한 실명제를 도입하려다 막판에 두 손을 번쩍 들었다.

엄청난 액수의 화폐가 개인금고 속에 잠기고 정상적인 현금유통이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가명이나 차명으로 된 계좌가 지하로 숨어들면서 정권의 기반을 위협했다. 실명제가 실시된 것은 11년의 세월이 지난 93년이었다. 경제규모가 커지고 금융질서도 안정단계에 접어든 시기였다.

이로부터 다시 8년 뒤인 재작년 금융시장이 요동을 쳤다. 국가기관에 의해 거의 무차별적으로 이뤄진 계좌추적으로 돈의 흐름에 제동이 걸렸다. 정치자금 등과 관련된 수사가 끝없이 진행될 때마다 불법.편법 계좌추적이 이어졌고 비리와 전혀 관계없는 제3자의 금융거래 내역과 사생활이 공개되고 말았다.

당시 여야가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 금융실명거래법 개정을 통해 국가기관이 함부로 금융계좌를 뒤지지 못하도록 요건을 크게 강화했다.

우리는 최근에 몇가지 주목할 만한 사태를 목격하게 된다. 국세청은 세정 혁신방안의 하나로 개인이나 법인의 금융거래 정보를 일괄 조회할 수 있는 방안(금융실명거래법 개정)을 추진하고 있다. 공정거래위원회는 부당 내부거래 조사를 위해 항구적인 계좌추적권이 필수적이라며 공정거래법 개정을 희망하고 있다.

그 뿐인가. 감사원은 감사원대로, 검찰은 검찰대로, 금융감독원은 또 나름대로의 이유를 들어 해당 기관이 특정 계좌를 들여다볼 수 있는 권한을 달라고 한다. 신속하고도 원활한 수사 및 조사를 위해 금융정보 요구권 또는 계좌추적권이 필요하다는 주장이다.

각 기관의 설명을 들어보면 그럴 만한 합당한 이유가 있다. 그러나 돈의 속성은 이들의 의도를 광범위한 위협으로 느끼며 보다 철저하게 개인 비밀을 보호해줄 곳을 찾아간다. 그런데도 거의 모든 기관들이 동시적이며 경쟁적으로 계좌추적권을 손에 쥐고자 한다. 법원에 대한 영장청구 절차를 생략하고 계좌추적의 폭을 더욱 확대하고 싶어한다.

계좌추적의 오.남용을 방지하기 위한 현행법의 까다로운 요건에도 불구하고 특정사건과 관계없는 개인의 금융거래 정보가 흘러다닌다. 예금자에겐 정말 황당한 일이다. 새로운 정부가 그런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지는 더 두고 봐야한다.

이런 상황에서 일부 기관이 금융정보의 일괄조회 제도 도입을 서두르는 것은 시기상조다. 개혁과 혁신이라는 이름으로 각종 정책을 추진하더라도 예금자의 비밀은 엄격하게 지켜지더라는 미더움을 앞세울 방법은 없는가.

국세청이 마련하고 있는 고액 현금 입출내역 통보제도는 그 취지로 볼 때 결코 반대할 사안이 못된다. 그러나 비리도 없는데 정치적 목적으로 꼬투리 잡히지 않을까 하는 불안감, 개인 정보가 유출되지 않을까 하는 불신이 시장에 팽배해 있다는 점을 감안해야 한다.

사회적 자본이란 사람 간의 신뢰, 정부에 대한 신뢰가 그 근본이다. 무엇보다 비리와 무관한 돈의 비밀 보호에 대해서 정부가 엄격해야 한다. 사회적 자본은 그렇게 해서 커진다.

최철주 논설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