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가쟁명:유주열] 김옥균과 상하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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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KBS 드라마에 등장한 김옥균(金玉均 1851-1894)이 화제가 되고 있다. 어느 지인(知人)은 중국 상하이 출장길에 김옥균이 저격된 동화양행(東和洋行)이라는 호텔을 찾아보았는데 알 수 없었다고 하면서 일본 도쿄에 있다는 김옥균의 묘(墓)에 대해 물어 왔다.

과거 도쿄의 대사관에 근무할 때 대사관에서 멀지 않은 아오야마(靑山)공동묘지에 있는 김옥균의 묘를 가끔 찾아 가 본 기억이 난다. 일본 근세사의 유명한 인물들이 잠들어 있는 아오야마 묘지는 도심 한 가운데 있지만 수림에 쌓여 시골처럼 조용하여 역사를 음미하며 산책하기 좋은 곳이었다.

김옥균이 죽기 10년 전 1884년 박영효 등 친일개화파가 일본의 지원을 과신(過信)하여 우정국 낙성식 연회에 맞추어 쿠데타(甲申政變)를 일으켜 수많은 수구파인사를 살해 하면서 “갑신청일전쟁”을 불러 왔다. 그러나 김옥균을 지원한 다케조에(竹添進一郞) 일본공사가 지휘하는 일본군 150명은 위안스카이(袁世凱)의 1500명 청(淸)군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일본의 대패로 “3일천하”로 끝난 김옥균은 망명 10년간의 일본생활에서 갖은 수모를 겪으면서도 권토중래의 기회를 엿 보고 있었다.

1894년 3월 김옥균은 그를 암살코자 하는 프랑스 유학생 출신의 홍종우의 꾐에 빠져 상하이로 오게 된다. 청국공사 리징팡(李經方)이 양부(養父)인 중국의 실력자 리훙장(李鴻章)을 만나도록 주선한다는 거짓 서한을 믿었던 것이다. 홍종우는 조계지에 있는 일본인이 경영하는 동양양행 호텔 방에서 김옥균을 피스톨로 저격 암살한다. 도쿄 경제대학에 보관된 당시 언론에 보도된 삽화를 보면 흰 도포에 갓을 쓴 홍종우가 양복의 상의를 벗고 조끼차림으로 의자에 앉아 책을 보고 있는 김옥균의 머리를 향해 저격하고 있다. 그가 읽고 있던 책이 바닥에 떨어져 있다.

김옥균의 시체는 중국 군함에 의해 본국으로 돌아 왔으나 조선 조정은 이미 죽은 김옥균에 능지(凌遲)형을 내렸다. 시신을 조각내어 팔도에 보내졌고 목은 “대역무도옥균(大逆無道玉均)”이라는 현수막과 함께 한강 양화진 백사장에 효수해 놓았다. 그러나 일본의 우인(友人)들은 김옥균의 유발(遺髮) 및 옷가지 등 유품을 모아 아오야마 공동묘지에 가묘(衣冠塚)를 만들고 참배를 해 왔다.
김옥균 묘는 3m 높이의 자연석으로 된 비석이 세워져 있어 멀리서도 찾기 쉽다. 그 비석에는 박영효가 지었다는 시(詩)가 새겨져 있다.

포비상지재(抱非常之才) 우비상지시(遇非常之時)
무비상지공(無非常之功) 유비상지사(有非常之死)
(대단한 재능을 가지고도 때를 잘못 만나
대단한 공을 세우지 못하고 뜻밖에 죽음을 맞이하였네)

금년이 김옥균이 상하이에서 최후를 맞이한 해로부터 120년이 된다. 그리고 그해 7월 25일 우리 바다 풍도 근해에서 “갑오청일전쟁”이 발발하였다.

최근 동북아를 둘러싼 세력개편이 빠르게 진행되고 있는 것을 보면 당시 김옥균이 만났던 시대상황과 비슷한 점이 있다. 다만 떠오르는 국가가 일본에서 중국으로 바뀌었을 뿐이다. 주변 강국의 갈등 속에서 김옥균이 가졌던 고민이 먼 옛 날 이야기가 아니다.

유주열 전 베이징 총영사=yuzuyoul@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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