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 나의 동경 나의 위안] 너무 일찍 침묵에 빠진 김영욱 바이올린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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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5호 27면

아직 20대였던 1974년에 녹음한 김영욱의 멘델스존 협주곡 음반. 정경화가 장작불이라면 김영욱은 숯불이다. 최정동 기자

피아노에 비해 바이올린 연주자의 연주 수명은 적어도 십여년은 짧은 것 같다. 이십세기 바이올린의 왕자 칭호를 듣던 유진 이자이(1858-1931·작은 사진)의 연주를 찾아 듣는데 노년의 연주를 찾아 볼 수가 없다. 음반은 없고 그나마 유튜브에 올려진 걸 듣는데, 모노시대의 젊은 날 연주에 곡목도 제한되어 있고 음질도 듣기 거북할 정도다. 찍찍거리는 잡음 속에 겨우 들은 슈베르트 자장가는 그래도 가슴이 뭉클할 정도로 색채와 질감이 선연하다.

바이올리니스트의 연주 수명

“당신이 만일 아버지 모습을 볼 수 있다면, 그리고 아버지가 매일 몇 시간이고 스케일을 천천히, 공들여 연습하시는 것을 볼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그것은 처절한 것이며 우리는 슬픔을 참을 수 없습니다.” 이자이의 아들이 파블로 카잘스에게 보낸 편지 한 구절이다. 카잘스는 1927년 봄 베토벤 사후 100주년 추모음악회를 바르셀로나에서 열면서 당시 70세이던 이자이의 연주를 청했다. “나는 베토벤 협주곡을 14년 동안이나 연주해 본 적이 없다오.” 완곡하게 거부한 이자이의 첫마디다. “당신은 할 수 있고 또 해낼 것입니다.” “기적이 일어날까?” 친구의 부추김에 이자이의 마음이 흔들렸다. 이렇게 약속하고 이자이는 맹연습에 몰두했는데 그것은 곁에서 지켜보는 가족이 고통스러울만큼 처절했던 것이다.

카잘스의 연주회 후일담이다. “나는 지휘봉을 들었고 그는 바이올린을 들었다. 그리고 첫 소리가 나자, 나는 모든 일이 잘 되리라는 것을 알았다. 몇 군데서 그는 균형을 잃고 시종 긴장하였지만 여러 곳에서 위대한 이자이의 면모를 보였으며 전체적인 효과는 놀라웠다. 과거에 항상 그랬지만 나는 그의 음악에 빠져들었다. 연주가 끝나자 우레와 같은 갈채가 있었다. 분장실에서 이자이는 감정에 복받쳐 내 손에 키스하며 울었다. 그는 소리쳤다. 부활!” 이자이는 60살 이전에 베토벤 협주곡을 손에서 놓았다는 이야기이다.

바이올린에서 나의 첫 우상은 김영욱(1947~, 서울음대)이었다. 그가 초등학교 5학년 엔가, 계동의 옛 휘문중학 교정에서 열린 연주회에서 들었던 멘델스존 협주곡 연주는 내가 처음 듣는 곡이었고 그 감동은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 그 뒤로 수많은 멘델스존 협주곡을 들었지만 여전히 그 연주가 내겐 최고의 연주로 남아있다. 정경화, 사라 장의 연주가 이어지고 지금은 수많은 재능들이 유럽 무대를 수놓고 있으나 그때 김영욱 외에 떠올릴만한 다른 이름도 없었다. 야외에서 열린 그 연주회 참석을 위해 금호동에서 계동까지 오후 한나절을 걸어서 갔던 기억이 있다. 김영욱이 중학교 1학년 때 도미 기념으로 개최된 연주회에도 나는 참석해서 그의 멘델스존 협주곡 연주를 들었다. 첫 연주를 듣던 때 내가 대학 초년생이었는데 사실 다른 외국 연주가를 알지도 못했다.

그리고 세 번째, 그가 뉴욕 필하모닉과 금의환향하던 그 연주회-1978년 7월 중앙일보 주최, 세종문화회관-에도 나는 어김없이 참석했다. 지금도 가지고 있는 연주회 프로그램을 보면 레너드 번스타인이 동행하기로 되었는데 그의 부인이 급서하는 바람에 에리히 라인스도르프가 대신 오게 된 사정과 함께 번스타인의 유감 메시지도 얼굴 사진과 함께 실려있다. 이 연주회에서도 김영욱은 고국 팬들에게 “보세요. 나는 이만큼 성장했답니다” 하고 입증이라도 해 보이겠다는 듯 멘델스존 협주곡을 다시 연주하고 있다.

그러나 뉴욕필과 협연한 연주보다 여름밤 학교 마당에서 들었던 초등학생 때의 연주가 어찌된 영문인지 내겐 더 빛나는 명연주로 각인되어있다. 그 연주는 내게 ‘초등학생 몸 속에 어른이 숨어있다’고 착각할 만큼 모든 것이 갖춰진 연주였다. 세밀한 부분, 빠른 부분 어느 것 하나 놓치지 않는 기교의 정확성은 물론 소리에서는 향기와 기품이 묻어났다. 어린 친구가 어떻게 저런 연주를! 재능에 대한 선망과 찬탄의 한숨이 절로 나왔다. 그는 이미 그때 모든 걸 갖추고 있었다. 나는 그의 이름이 지구촌에 회자될 날이 머지 않을 거라고 예감했다.

“나는 천재란 말을 함부로 쓰지 않으나 김영욱이야말로 천재다.”(레너드 번스타인)

“기교적으로 완벽한 젊은 거장. 이를 데 없이 감미로운 인토네이션과 가슴을 파고드는 톤의 절묘한 아름다움.”(1964년 유진 오먼디의 필라델피아 교향악단과 협연을 마친 뒤 현지 평가)

“왜 이제야 이런 연주가를 데려왔는가?”(1970년 잘츠부르크 음악제에서 ‘디 프레스’지)

김영욱이 밖에서 들은 평가들은 열린 귀만 있을 뿐 음악 체험이 턱없이 빈약했던 내가 처음 그의 연주를 듣고 느낀 것과 별로 다를 것도 없다. 그는 초등학생 때 모든 가능성을 충분히 보여줬던 것이다.

연주가로서 현재 김영욱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귀국 후 음악교육에 봉직한다는 소식을 몇 해 전 들었는데 그가 무대에 섰다는 얘기는 근래 들은 바가 없다. 교육도 중요하지만 그건 내가 처음 그려봤던 그의 모습은 아니다. 삶의 자취가 온전히 무르녹은 원숙한 연주무대를 그에게 기대하는 것은 욕심일까? 어릴 때 연습이 지겨워 몰래 만화가게로 갔다가 형에게 혼나곤 했다는 그의 일화가 떠오른다.

이자이가 60세도 채 안 돼 베토벤 협주곡을 놓아버린 것과 김영욱의 침묵은 어떤 관계가 있을까? 활을 잡고 무대에서 청중에게 감동을 선물한다는 것은 이자이의 땀과 눈물이 보여주듯 역시 몸과 정신의 일치로만 가능하다는 걸 새삼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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