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곡 양일동선생 영전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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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유정<전 신민당 전당대회의장>
현곡선생! 이 어인 비보란 말입니까. 너무도 원통해 영정 앞에서 실컷 울고 말았습니다.
그 어려운 시절에 통일당을 거의 혼자 힘으로 끌고 오시다 그토록 이나 바라시던 민주회복을 눈앞에 두고 훌쩍 떠나시다니 이렇게 박복할 수가 있습니까.
지난 2월 중순 우석병원에 입원하셨을 때도 『나는 곧 퇴원하겠지만 은석이 건강해야 할텐데』하며 제 위장병을 오히려 걱정하시고 며칠전 다녀왔다는 천마산의 산행을 자랑스럽게 말씀하시던 선생이 이렇게 먼저 가시다니….
지난 72년 신민당이 효창동과 시민회관에서 두 동강난 전당대회를 치른 뒤 『이 나라에 선명야당이 진짜 필요하니 어려운 때지만 내가 앞장서서 십자가를 지겠다』며 통일당 창당을 위해 애쓰시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합니다.
신당참여를 약속했던 18여명의 의원중 대부분이 하루밤 사이에 마음이 변해 4∼5명만 남았을 때도 『한번 옳다고 생각하면 끝까지 밀고 나가야한다』 그 선생은 동지들을 격려하셨습니다.
긴급조치 아래서 전국의 교도소를 돌며 긴급조치위반으로 수감된 종교인·학생들을 일일이 찾아 영치금과 의복을 넣어주며 옥바라지하던 현곡선생, 명동 3·1사건 공판때도 빠짐없이 나오시고 동지들의 경조사를 일일이 보살폈던 선생께서 비우신 그 자리를 이제 그 누가 메우겠습니까.
한일회담 반대· 3선 개헌 반대 등 정치활동은 억척같고 모질었지만 인간적인 약함 때문에 술자리에서 「아리랑」 「애수의 소야곡」 등 구슬픈 노래만 부르시던 선생의 목소리가 아직도 귓전에 맴돌고 있습니다.
10대 총선을 앞두고 유신체제 하에서 선거참여문제를 놓고 의견이 갈려 저와 이상돈 동지 등은 선생 곁을 떠났지만 반 독재라는 똑같은 명제 때문에 우리는 다시 만날 수밖에 없었던 운명들이었습니다.
선생의 정치행동이 아리송하다는 등 비난도 없지 않았지만 아는 사람들은「모난 돌이 정 맞는다」는 속담대로 어려운 때 항상 앞장서는 선생의 성품 때문이란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가정은 단지 잠자는 곳 정도로만 생각하고 사는 집까지도 2∼3차 저당을 잡히신 선생은 정말 모든 것을 정치에 받치신 이 시대의 풍운아이셨습니다.
야당통합·참다운 민주주의의 실현 등 지금 이 나라는 현곡선생 같이 용단과 추진력을 갖춘 지도자를 절실히 요구하고 있습니다.
이 나라 민주주의를 위해 마지막 힘을 발휘하셔야 할 선생이 먼저 떠나시니 애통할 따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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