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나당 연합군의 마지막 결전장|주유성은 부안 위금암산성|개암사의 유래적은 「별기」발견으로 밝혀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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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백제 광복의 뜻을 펴지 못한 채 죽은 복신장군과 도침대사의 원혼을 달래는 부락제「은산별신제」(20∼23일·충남부여군은산면은산리)가 열리는 것과 때 맞춰 백제부흥군의 마지막 항전 터 주류성의 위치를 확인해주는 자료가 발견돼 학계의 관심을 끌고있다.
최근 지리학자 노도양박사(명지대박물관장)가 입수, 공개한 이 자료는 전북부안군 변산반도에 있는 개암사의 유태를 적은「별기」다. 가로26cm, 세로35cm의 한지에 기록된「별기」의 내용은 1천3백여년이 지난 현재 위치설정에 논란이 많았던 백제의 주류성이 바로 이 설에 인접한 위금암산성이라는 사실을 밝혀주고 있다.
「안고사적기원효방상량문운」으로 시작되는 이「별기」전반부의 대략의 뜻은 다음과 같다.『옛날 사적기를 찾아보면 원효방상탐문에 다음과 같은 글이 적혀있다. 묘련의 아들 도침은 무왕의 종자 복신과 함께 군사를 일으켜 이산의 주류성에 근거하여 항전하였다.
왕자 부여 풍을 왕위에 오르게 하고 일본에 원조를 구하였다. 그리하여 수만의 왜병과 병선4백척이 내원. 그 세력이 크게 떨쳤다.』
이 글 말미에「밀영이 적었다」라고 기록자를 밝히고 있는데 노교수는 개암 사적기에 따르면 밀영은 17세기의 승려이며 이 절에 있을 때 이전부터 전해온 사적기가 있었고 이중「원효방상량문」이 적혀있어 이를 다시 인용한 것으로 추정했다. 따라서 별기가 부안의 위금암산성이 곧 주류성임을 밝혀주는 직접적인 사료는 되지 못하더라도 3백년전에 이 같은 사실을 전하는 문원(사적기)이 있었음을 알려준다는 점에서 귀중 사료임에 틀림없다고 평가했다.
이 자료는 우연한 기회에 발견되었다. 지난해 12월3일 개암사현주지 허모스님이 대웅전에 아침 예불을 하러들어 갔을 때, 삼전불중 가운데 부처님 좌수가 떨어져 있음을 알게된 것이다. 그리고 주변에 휴지 같은 몇 장의 종이쪽이 흩어져 있어 이를 주워보니 위와 같은 내용의「별기」가 적혀있더라고. 불상을 훔치려던 사람의 소행 때문에 뜻하지 않은 수확을 거둔셈이다.
백제가 주류성을 근거지로 싸우게 된 사실은 역사적으로 의미가 크다. 660년 백제가 신라·당연합군에 멸망하게 되자 백제의 유민들은 조국의 광복을 위해 각처에서 신라 및 당군에 항전을 계속했다. 3년을 끈 이 싸움 중 이비성싸움, 왕흥사잠성·두능윤성싸움, 지나성 싸움, 진현성싸움, 주류성싸움, 임존성싸운은 대표적인 항전으로 꼽힌다.
특히 주류성싸움은 그 규모에 있어 백제·당·신라·일본의 4개국 군대가 참가한 국제 전이었다.
이 주류성싸움에서 백제군은 패하고 성도 함락되어 백제부흥군은 거의 재기 불능이 되었다. 결국 주류성싸운은 백제최후의 항전이었던 것이다.
새로 발견된「별기」후반부에 이 싸움 이후의 사정을 알려주는 새로운 사실이 적혀있어 흥미를 끈다.『풍왕은 고구려로 달아나고 좌평 여자신 달율 억예복유·곡나진수 등은 잔류부대를 이끌고 일본으로 도망하였다.』
종래 우리 학계에는 이 주류성의 위치를 두고 크게 부안군요산세과 서천군한산세로 갈려있었다.
처음 관심을 가진 학자들 중 일본 학자들로「쓰다」(진전좌우길)「이께우찌」(지내굉)등은 한산세을 주장했고 이병오박사(학술원회장)도 이 의견에 따랐다. 이에 반해 일본의「이마니시」(김서룡)는 그의 「백제사연구」에서 고부의 두승산성이라 그 이견을 내세웠으며 최근에는 다시 전영내씨(전주박물관장·고고학)와 노도양박사가 변산세을 고집해왔다.
노박사는 지금까지 주류성의 위치가 불확실해진 것은 『신라가 정권을 잡은 뒤 백제의 구 강역을 재편성, 지명까지 바꾸어 버렸기 때문』이라면서『주류성도 이러한 승자의 정책에 휩쓸려 그 성터조차 모르게된 것』이라고 풀이했다.
주류성에 대한 기록은 663년 9월 이성이 합락 된지 5백여년이 지난 후 김부식의『삼국사기』에『지나성은 주류성이라고도 한다』고 처음소개하고 있다.<방인철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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