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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 Report] 2121만 장, 신용카드 실종사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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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2면

[일러스트=이정권 기자]

직장인 이수영(32)씨는 지난해 체크카드를 새로 발급받았다. 평소엔 체크카드로 쓰다가 은행 잔고가 부족할 땐 일정금액을 신용카드처럼 사용할 수 있는 하이브리드형이다. 기존에 발급받은 신용카드가 있지만 쓰지 않는다. 이씨는 “소득공제 혜택도 있지만 계획적인 지출을 위해 체크카드나 현금을 주로 쓴다”고 말했다. 신용카드가 사면초가(四面楚歌)에 빠졌다. 1년 사이 국내 인구 절반에 가까운 숫자의 카드가 사라졌다. 가계 빚의 주범으로 찍혀 소득공제 혜택이 줄고, 알뜰소비 풍조가 확산되면서 체크카드에게 밀리면서다. 소비자의 결제 행태와 카드사의 마케팅은 체크카드 중심으로 재편 중이다.

 21일 한국은행과 여신금융협회에 따르면 올 5월 말 기준 발급된 전체 신용카드는 9419만 장으로 1년 전(1억1540만 장)에 비해 2121만 장(18.3%) 줄었다. 반면 체크카드는 올해 3월 말 기준 9813만장으로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 도화선은 금융당국의 휴면카드 정리정책이다. 지난해부터 1년 이상 사용하지 않은 휴면카드는 고객의 요청이 없으면 자동으로 해지된다. 지난해 8월만 해도 신용카드는 1억1500만장 수준을 유지했지만, 올 2월에는 1억장 아래로 떨어졌다. 2009년 이후 처음이다. 이미 금융당국은 2012년 고위험·저신용자의 신용카드 발급 문턱을 높인 바 있다. 모범규준을 통해 기존의 명목소득 대신 갚아야 할 채무를 제외한 가처분소득이라는 새로운 소득 산출 기준을 세웠다. 신용등급이 7등급 이하인데 카드를 발급받으려면 객관적인 자료를 통해 월 가처분소득이 50만원이 넘는다는 것을 증명해야 한다. 자격이 되지 않는 사람을 마구잡이로 모집할 수 없다는 얘기다.

 올해 초 KB국민·NH농협·롯데카드 3사의 개인 정보 유출 사고는 불 난 집에 기름을 부은 격이 됐다. 카드3사에서만 지난해 연말과 비교해 262만 장이 사라졌다. 올 들어 5월 말까지 줄어든 신용카드는 휴면카드를 포함해 662만장이나 된다. 설상가상으로 모집인·콜센터 등을 통한 영업 활동이 제한되면서 신규회원 모집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못했다.

 빈 자리는 체크카드가 빠르게 채워나갔다. 소득공제 혜택 확대가 날개 역할을 했다. 연봉의 25% 초과 사용분에 대한 신용카드 공제율이 15%로 낮아진 반면 체크카드는 현금영수증과 같은 30%(한도 300만원)로 높아졌다. 이 공제율은 연봉의 25% 이상 소비를 한 이후에야 비로소 의미가 있지만 절세에 민감한 소비자들은 앞다퉈 체크카드를 발급 받았다.

 금융감독원의 통계도 이러한 현상을 반영한다. 올해 1~3월 신용카드 이용실적은 119조5000억원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117조3000억원) 대비 1.9% 증가하는데 그쳤다. 반면 체크카드 이용금액은 25조9000억원으로 지난해(20조3000억원)보다 27.6% 늘었다. 전체 카드구매 실적 중 체크카드가 차지하는 비중은 17.8%로 뛰었다.

 가장 큰 문제는 신용카드를 발급받을 수 있는 소비자들까지 외면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신용카드 포인트·할인 혜택이 과거보다 축소되면서 매력이 떨어진데다 합리적인 소비를 원하는 젊은층이 신용카드를 기피하고 있는 것이다. 회사원 조유빈(29)씨는 “카드사용액을 들여다보면 소득공제 혜택을 받기 위해선 지금보다 훨씬 더 많이 써야 한다”며 “소득공제 혜택보다는 계획적으로 지출하기 위해 체크카드를 쓴다”고 말했다.

 앞으론 신용카드 발급자들이 누리던 신용 강점도 사라질 전망이다. 그동안 신용카드를 연체 없이 잘 써온 소비자들은 개인신용평가 과정에서 가산점을 받았다. 체크카드는 그동안 신용카드 발급이 어려운 사람들이 주로 이용했고, 통장에서 바로 빠져나가 신용을 평가하기 어렵다고 보아 가점 수준이 낮았다. 그러나 최근 체크카드로 바꿨다 신용등급이 떨어지는 사례가 발생하면서 금융감독원과 개인신용평가사들이 태스크포스(TF)를 구성해 가점 조정을 논의하고 있다. 체크카드의 가점이 신용카드의 60~70%수준으로 맞춰질 것으로 보인다. 금감원 오홍석 상호여전감독국장은 “그동안 외국에 비해 신용카드를 비정상적으로 많이 써왔는데, 체크카드 이용을 늘리고 신용이 좋은 사람만 신용카드를 쓰는 방향으로 가는 게 맞다”고 말했다. 여신금융협회 이태운 부장은 “체크카드 이용이 늘고 있기는 하지만 결제 금액이 크다면 결국 신용카드를 쓸 수밖에 없을 것”이라며 “경기가 좋아지면 신용카드도 다시 활성화될 가능성이 크다”고 내다봤다.

박유미·심새롬 기자

◆신용카드=바로 돈을 내지 않고도 상품·서비스를 살 수 있는 일종의 ‘외상’ 카드. 미리 정한 결제일(월 1회)마다 이용대금이 고객 계좌에서 자동으로 빠져나간다. 여러 차례에 걸쳐 돈을 나눠 내는 할부 거래도 가능하다. 소득공제율은 사용 금액의 15%(300만원 한도).

◆체크카드=결제 즉시 고객 계좌에서 대금이 빠져나가 잔액 범위 안에서만 사용이 가능한 카드. 신용카드처럼 가맹점에서 24시간 쓸 수 있고 전자상거래나 해외 사용도 되지만 할부 및 현금서비스 기능은 없다. 정부는 체크카드 소득공제율을 신용카드의 두 배(30%·300만원 한도)까지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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