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프터·유」정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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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타워링·인페르노』라는 미국영화가 있었다. 고층 「빌딩」에 화재가 일어나 소동이 벌어지는 얘기다. 서울에서도 상영돼 많은 관객을 모았었다.
온통 불길에 싸인「빌딩」.「스카이·라운지」엔 수백 명의 사람들이 갇혀 있었다. 이들이 탈출할 수 있는 길은 옥외 「엘리베이터」와 「로프」를 이용하는 방법뿐이었다.
물론 전원탈출은 불가능했다. 이제 누가 먼저탈 것이냐가 문제였다, 그 순간 장내는 웅성거리기 시작한다. 그러나 암묵간에 합의가 이뤄진다. 여자와 약자우선. 잠시의 소란이 없지는 않지만, 끝내 질서는 지켜졌다.
이것은 「드라마」속에서나 볼 수 있는 미덕 같지만, 어떤 사회에선 엄연한 현실속의 「모럴」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영국사람들이 일상 중에 즐겨 쓰는 말이 있다. 『애프터· 유』-. 『당신이 먼저』라는 말을 이들은 『나는 당신 뒤에』 라는 말로 표현하는 것이다. 한결 여유가 있어 보인다.
흔히 관청의 민원창구에서 볼 수 있는 광경. 수십 명이 저마다 팔을 내밀고 발돋움을 하며 아우성을 친다. 어느 면에선 불친절을 자초하는 셈이다. 더우기 진풍경인 것은 사람이 많이 모이는 곳일수록 으례 장대나 몽둥이를 휘두르는 경찰이나 경비원이 있다.
필경 이것은 사회교육의 문제, 아니면 사회심리의 문제인 것 같다. 어릴 때부터 공중도의를 위한 사회교육이 충실하게 이루어진다면 아마 성인이 되어서도 『애프터·유』의「모럴」에 익숙해 질 수 있을 것이다.
한편 사회심리학의 면에서도 생각해 볼 수 있다. 우리는 긴 역사를 통해 너무도 많은 불신과 배반을 체험해 왔다. 공포의 체험도 마찬가지다. 석유 값이 오를 때 주부들이 앞을 다투어 휴지와 일용품을 사들이는 것 도 그런 심리의 하나일 것 같다.
새로운 문제, 새로운 환경에 직면하면 사람들은 우선 공포감부터 갖는다. 이런 심리는 삽시간에 도피적인 난중, 공격적인 난중, 아니면 획득적인 난중의 모습으로 바뀐다. 이것은 어느 사회의 사람들에게도 있는 현상이지만, 우리는 좀 지나친 것 같다.
사회의 불안·갈변과 충격의 연속, 불신의 만연 등에서 빚어진 사회심리일 것이다.
요즘 부산의 어느 국민교에서 조회시간에 몰려나오던 어린이들의 압사 사고가 있었다. 시설의 미비, 감독의 불성실도 물론 있었다. 하긴 그것자체가 벌써 「모럴」부재, 무정임의 반영인 것이다. 어린이가 모여 생활하는 건물 자체가 비인간화의 「모델」이었던 것이다.
그 보임이 우리 모두에게 있다는 것 도 더 말할 나위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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