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할머니 잔정인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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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외할머니 손주보듯 한다』는 말이 있다. 그저 가엽고 애처롭게만 생각한다는 뜻이다.
손주 몸에 종기가 나도 아파할까봐 짜지 못하고 애만 태운다. 그러는 사이 종기는 점점 커져 결국 큰 탈을 내게된다.
요즘 정부의 경제시책엔 외할머니의 잔정이 듬뿍 서려있다. 지난번 환율인상 때도 그러더니 이번 유가인상도 그렇다.
환율을 올리기로 결정해 놓고도 그로인한 고통을 하루라더 늦추려는 애틋한 충정(?) 때문에 보름 이상을 끌고서야 결국 단행했다. 환율을 올린다는 사실을 미리 알아내 소동을 벌인 사람들이 나쁘지 환율같이 과단성을 보여야 할 정책까지 심사하고 숙고하여 민주적으로 처리하는 자세를 탓할 수는 없다고 해야할지….
이번 유가인상도 미리 소문이 퍼져 온갖 소동이 나고서야 단행되었다. 물가 올리는 것을 좋아할 사람 아무도 없겠지만 오죽해야 마지막엔 『빨리 값을 올려 사기나 쉽게 해달라』는 말이 곳곳에서 나왔겠는가.
하도 결단이 늦어지니 『정부 내의 불협화음이 심한가…』 『서로 책임을 안지려고 그러는가…』 『정책결정 단계가 너무 복잡한가』하는 오해도 나왔다.
그러나 등유를 못사 며칠 밥을 못해먹는 한이 있어도 유가인상을 며칠이라도 늦춰 어려운 사람들의 부담을 덜어주려는 마음씨만은 눈물겹다.
종기를 짜야한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그저 안스러워 망설이고 또 망설이는 외할머니의 잔정, 바로 그것이다. 그래도 『그동안 그토록 주무르더니 59.43%나 올리려고 그랬느냐』는 불만이 많이 나오고 있다.
정부로선 『우리가 근 열흘동안 애써 깎았길래 59.43%지 그렇지 않았던들 그보다 더 높았을지 아느냐』는 반문이 나올 지 모른다. 무슨 빈틈없는 이유가 있건 59.43%나 기름값이 오르는 고통은 너무 심하다.
외할머니의 잔정도 좋지만 망설이다 아픔을 한꺼번에 더 주는 일은 이제 그만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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