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명의 경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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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팔레비」「이란」왕이 79년1월16일 「이집트」의 「카이로」공항에 도착했을 때 「팔레비」왕은 「사다트」「이집트」대통령의 뜨거운 영접을 받았다. 「팔레비」의 대「이집트」경제 지원으로 「사다트」는 적지 않은 도움을 입었던 것이다.
「애스원」이 영구망명처가 되지 못함을 잘 알고있는 「팔레비」는 다음거처를 「모로코」로 잡았다.
「이집트」방문 1주일 후 찾아간 「모로코」의 「말라케시」왕실별장에서 「팔레비」는 당분간 이곳이 영구망명처가 되는 듯한 인상을 주었다.
그러나 「호메이니」옹이 「팔레비」의 「이란」송환을 강력히 요구하고 「모로코」내의 반「팔레비」시위가 과격해짐으로 해서 「팔레비」는 다시 새로운 안전한 망명 처를 구해야했다.
「팔레비」는 다시 안식처를 미국으로 물색하고 있었다. 그러나 「워싱턴」은 「호메이니」의 회교혁명정부의 눈치를 보느라 「팔레비」의 미국입국을 완곡히 거절했다. 이때 「팔레비」는 『미국이 나를 배신했다』고 울분을 터뜨리기 시작했다.
그래서 낙착된 곳이 대서양상의 「바하마」군도.
그러나 「바하마」 역시「팔레비」를 환영만 하는 곳이 못되었다.
「할할리」「이란」혁명재판소장이 「바하마」로 암살단을 보냈다는 소문이 돌고 「바하마」가 경호가 쉽지 않다는 이유는 그를 다시 불안하게 했다.
그 불안은 「팔레비」가 한때 정신착란에 걸렸다는 보도가 흘러나올 정도로 심했었다.
그래서 네 번째로 선택한 곳이 「멕시코」였다.
「멕시코」생활 4개월 동안 「팔레비」는 그런 대로 견딜만했었다. 비록 3차례에 걸친 암살단의 「팔레비」저격음모가 있었고 한번은 부상까지 당했다는 소문이 있을 정도로 위태로웠던 적도 있었으나 「멕시코」당국의 보호와 개인경호원 3백 명의 물 샐 틈 없는 경호는 비교적 무난했다.
「팔레비」는 「멕시코」의 휴양지 「아카풀코」의 망명 처에서 옛 미국친구들인 「닉슨」 「토드」 「키신저」들을 만나 자신의 장래를 심각하게 토론하기도 했다.
그 결과로 나타난 것이 제2의 「이란」사태를 불러일으킨 「팔레비」의 미국입국이었다.
「팔레비」의 「뉴욕」시 도착은 담낭암 수술을 위한 것으로 발표가 됐었다.
그것은 집권시절 밀접한 관계에 있던 미국의 대재벌 「록펠러」전 미국부통령이 「옛정」을 배반하지 않은 미국입국 주선으로 가능했다는 설명이다.
「록펠러」가 「체이스·맨해턴」은행의 창구를 통해 「팔레비」의 엄청난 석유「달러」에 줄을 대고 있었던 것은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따라서 2백억「달러」라는 엄청난 돈을 빼돌린 「팔레비」의 재산에 「록펠러」가 비상한 관심을 쏟았을 것은 쉽게 짐작이 간다. 그래서 「록펠러」는 「키신저」를 하수인으로 내세워 「카터」행정부로 하여금 「팔레비」에게 미국입국을 허락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팔레비」의 미국입국은 「이란」 과격학생들의 「테헤란」주재 미국대사관 인질사건의 불행한 불씨가 되고 말았다.
궁지에 몰린 미국은 우선 일차적으로 「팔레비」를 미국국외로 내보내려 했으나 「멕시코」 의 「팔레비」재 입국 거부로 다시 곤경에 처했다.
「멕시코」의 거부반응은 「팔레비」로 인한 「멕시코」 국내 소요가 직접적인 원인이었으나 이미 「팔레비」의 막대한 돈이 미국의 손에 넘어갔다는 불만 섞인 반발이었다는 후문이다. 이 같은 설명은 「사다트」나 남「아프리카」공화국 역시 「팔레비」의 돈에 더 관심이 많은 「염불보다 잿밥」에 뜻이 있었다는 풀이와도 서로 상통하는 것이다.
사태가 급박하게 되자 「해밀턴·조던」백악관 대통령 수석보좌관이 「파나마」를 전격 방문해 「로오」「파나마」대통령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파나마」에서 다시 「팔레비」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역시 학생들의 반「팔레비」 소요였다. 영원한 망명 처 같이 보였던 「파나마」 역시 냉혹한 국제정치 현실 앞에 그의 몸 하나 기댈 곳이 못 됐던 모양이다.

<진창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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