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스한 세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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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올해도 어느덧 20일밖에 남지 않았다. 그런데도 올해는 세모의 을씨년스런 기분이 별로 나지 않는다. 철에 어울리잖게 날씨가 푹한 탓일까. 아니면 사람들의 마음을 들뜨게 만드는 일들이 너무나도 흔하게 쏟아져 일어나기 때문일까.
이런 때에는 사람들은 잊어야할 일은 안 잊고, 잊어서는 안될 일들을 곧잘 잊어버린다.
공자가 노나라의 재상이 되자마자 소정묘라는 대부를 처형했다.
문하생들이 까닭을 묻자 공자는 이렇게 대답했다.
『사람에게는 용서할 수 없는 5악이 있다. 하나는 일은 잘하지만 마음이 사악한 것, 두번째가 몸가짐이 비뚤어져 있고 완고한 것이다.
세번째가 거짓말장이이면서 말이 유창한 것, 네번째가 쓸데없는 것만 잔뜩 외고 있는 박식이다. 다섯번째가 나쁜 세력에 늘 붙어다니면서 은혜를 내세우는 것이다. 소정묘는 이 5악을 모조리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런 설명을 듣고도 한 제자는 납득할 수가 없었다. 덕치를 내세울 때는 언제였느냐는 것이었다. 얼핏 보면 공자 자신이 거짓말장이고 구변이 좋았다.
『사기』에 보면 『…공자년오십륙, 대사구로부터 상사를 항소하다. 희색있도다.』고 적혀있다. 이를테면 국무총리 직무대행이 됐다고 기뻐하는 공자에게 제자가 물은 것이다.
『군자란 화가 닥쳐와도 두려워하지 않으며 복이 와도 기뻐하지 않는다 하시잖았습니까?』
『허나 또 군자는 귀한 몸을 버리지 않은채로 남에게 굽신거리는 것을 즐긴다고 이르잖았느냐.』고 공자는 대답했다.
사마천은 일부러 공자를 깎아 내리려고 이렇게 적은 것은 아니다. 이러니까 공자는 옳았다, 틀렸다는 판단을 그는 일체 숨기고 있다.
『사기』는 사마천이 인생의 쓴맛 단맛을 다 본 그가 세모에 쓴 책이다.
순리대로만 되는 세상도 아니요, 모든게 흑백으로 완전히 갈라지는 것도 아니다,
아무리 공자라 해도 별수는 없었다. 사마천은 그저 이런 말을 하고 싶어서만도 아니었을 것이다.
권력자의 윤리는 보통 사람의 그것과는 다르다. 그리고 때로는 단순한 사법이 도덕이나 정의자리에 기어올라가는 수도 많다.
사마천은 암암리에 이런 권력의 비정한 논리를 사람들에게 알려주려 했을 것이다. 이렇게 봐야 공자도 살아난다.
지나가는 한해의 온갖 쓰라린 기억을 잊자고 사람들은 서두른다. 그런게 몸에도 대단히 좋다.
그러나 모든 것을 잊자고 세모가 있는 것은 아니다. 「5악」처럼 언제까지나 새겨둘 일들도 있다.
그래야 새해의 새 맛도 난다. 묵은해의 것을 말짱히 씻자는 것이 모든것을 잊자는 것이 될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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