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선「이란」이용만 이젠 믿지 못하겠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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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팔레비」송환을 요구하며「테헤란」미대사관에서 인질극을 벌이고있는 학생들에게는 미국에 대한 뿌리깊은 증오심을 엿볼 수 있다. 학생은 물론 「이란」 인들 일반에게 광범하게 자리잡은 반미 감정은 어떻게 생겨 난것인가. 최근 일본을 방문한 「이란」인 「찬기즈· 바하이」씨(41·「테헤란」대교수·미국제 교섭연구소연구개발부장)의 일지에 기고한 글을 롱해 알아본다.【동경=김두겸특파원】
지난4일 「테헤란」 미국대사관 점거사태이후 보복에 보복을 거듭해 오고있는 미국·「이란」분쟁은 쉽사리 돌파구를 찾지 못하고 있다.
혁명후 「이란」에는 미국에 대한 뿌리깊은「증오심」이 지배하고있고 특히 이같은 감정은 학생층에서 강하게 나타나고있다.
왜 「이란」에는 미국에대한 뿌리깊은 증오심이 생기게 됐을까 이의 해답을 캐는 것은「이란」혁명 그자체와 이제까지 미국이 취해온 대 이란」 정책의 성격을 밝히는 것으로도 될수 있다.
일반 「이란」인과 학생들에게 비쳐진 미국의 대「이란」정책은 「애치슨」「딜레스」「러스크」,그리고 「키신저」 등 역대 국무장관을 거치는 20∼30년 동안 전혀 변화된 것이 없었다. 굳이 변한 것을 찾는다면 각각의 정책시행 과정에서 나타난 실시방법이 조금씩 달랐다는 것뿐이다.
이같은 미국의 대「이란」정책 목표는 ▲「이란」을 중간의 안정세력으로 구축하는 동시에 대소 완충국으로 한다 ▲미국과 그 동맹국들에 석유를 확보, 가능한 싼값으로 안정된 공급을 한다▲「이란」을 미국의 상품시장으로 하고 「이란」에서의 석유수입과 공업제품을 소비하는 능력의 범위 내에서 이용한다는 3가지로 압축할 수 있다.
미국의 이같은 정책은「이란」 의 현실에서 보면 분명히「이용당하는 입장」 이었고 「이란」인들은「애치슨」 에서 「닉슨」에 이르기까지 상황이 달라지리라는 기대감도 가지지 못했었다.
그러나 「카터」 미대통령이 전세계에 걸쳐 인권존중을 강조하는 인권정책을 제시하자 「이란」 인들은 큰 기대감을 가지게 됐다.
「카터」의 인권정책은 그때까지 미국의 역대 정권에 의해 「샤」 (「팔레비」전국왕) 에의 「백지위임」이라고 할 수 있는 지원. 즉「샤」의 전체주의정치를 강화시켜 왔던「닉슨」 정권시대의 적극적인 지원이 드디어 종말을 고하게 된 것으로 받아 들여져 「이란」 인들을 고무시켰다.
가두 「데모」 가 꼬리를 물고 일어나 범위를 넓혀갔다. 「팔레비」측은 같은 민심의 변화를 알아채곤 가차없는 탄압으로 대응했다. 그러나 미국은「데모」대에 아무런 지지를 보내지 않았다. 그당시 (77년12월) 「카터」 미대통령은 「테헤란」을 방문, 「팔레비」와 연말을 함께 보내면서「이란」 의 경제발전을 이끈 그의 지도력을 추켜 세워주었다.
이같은 정치현실은「보기싫은 미국인」 으로 비쳐졌고 「이란」의 젊은이들, 특히 학생들의 심사를 뒤틀어놓았다.
「이란」학생들은 「카터」정권의 「가짜약속」에 철저하게 배반당한 것으로 느꼈고 「팔레비」 의 비밀경찰 「사바크」 의 위협에 쫓기게 됐다.
미국정부에 반감을 가진 현재의 「이란」 국민의 「증오심」은 이러한 배경에서 이해 될수 있는 것이다. 「카터」 행정부가 미국의 대「이란」정책을 수정할 수 있었던 시기는 확실히 수개월간은 있었다.
이경우 정책의 수정이라는 것은 「이란」을 「닉슨」의 방식』으로부터 완전히 탈피하는 것을 전제로 하여 그 결과「팔레비」에 대신하는 온건한 정권을 수립하는 것으로 된다. 「닉슨」 이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백악관을 떠났을 때 당연히 『「이란」 판 워터게이트 사건』을 지속하고 있던「팔레비」도「타락된 왕위」로부터 당연히 축출될 수 있어야했다. 「카터」미대통령은 대통령이 된 이후 1년 동안 그때까지의 『「닉슨」유의 방식』으로 부터 완전히 벗어나 「이란」의 실정을 파악하고 그에 따라 행동을 취할수 있는 귀중한 기회가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카터」 미대통령은」인들이 최소 5만명을 헤아리는 생명을 희생하면서 회교혁명을 성공 시킨 뒤 당초의 언질과는 달리 인도주의를 내세워「팔레비」를 미국에 입국시킴 으로써 「이란」인들의 뿌리깊은 대미감정에 불을 붙이는 결과를 빚어놓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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