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베 '군국의 향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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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푸아뉴기니를 방문 중인 아베 신조 일본 총리 내외가 11일 웨와크에 있는 일본인 전몰자 위령비를 찾아 참배하고 있다. 아베 총리는 이 자리에서 기자들에게 “조국을 생각하며 이곳 땅에서 쓰러진 12만 명 이상(파푸아뉴기니 전역에서는 20만여 명)의 희생이 있었기에 오늘날 (일본의) 평화와 번영이 있다”고 말했다. [파푸아뉴기니 로이터=뉴스1]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가 11일 태평양전쟁의 최대 격전지였던 파푸아뉴기니에서 일본인 전몰자비에 헌화했다.

 현직 총리로는 처음이다. 아베가 평화헌법의 근간을 뒤집는 집단적자위권 용인에 나선 직후 일본군 20만여 명이 전멸한 파푸아뉴기니를 찾은 것은 다분히 의도가 깔려 있다는 지적이다. 국제사회에는 “다시 전쟁을 일으키지 않겠다”며 평화를 다짐하는 제스처를 보이면서 국내 우파 지지세력들에게는 ‘강한 일본’의 필요성을 어필하려 했다는 것이다.

 실제 아베는 이날 부인 아키에(昭惠) 여사와 함께 북부 도시 웨와크의 일본인 전몰자비에 손을 모아 고개를 숙인 뒤 기자들과 만나 “두 번 다시 전쟁의 참화를 반복해서는 안 된다. 아시아의 벗들과 세계의 벗들과 함께 세계평화의 실현을 생각하는 나라로 남고 싶다는 걸 영령 앞에 맹세했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조국을 생각하며 먼 이곳 땅에 쓰러진 12만 명 이상(북부 뉴기니 지역 희생자 12만7600명을 지칭)의 희생이 있었기에 오늘날 (일본의) 평화와 번영이 있다. 오늘 그 사실을 다시 한 번 생각하며 경의와 감사의 마음을 담아 명복을 빌었다”고 말했다. 듣기에 따라서는 태평양전쟁을 정당화하는 듯한 말이다. 물론 보수층을 염두에 둔 발언이다. 일본 우익 사이에서 파푸아뉴기니가 갖는 상징성을 아베가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으로 해석된다.

일제에 의해 파푸아뉴기니에 강제 징용돼 희생된 한국인 4400명을 기리는 추모탑. [사진 주파푸아뉴기니 한국대사관]

 파푸아뉴기니에선 1943년 4월 18일 부겐빌 상공에서 일본 연합함대의 최고통수권자이며 진주만 공격의 주역이었던 야마모토 이소로쿠(山本五十六) 사령관이 전사했다. 제2차 세계대전 중 최고사령관이 전선에서 전사한 유일한 사례다. 야마모토가 탄 비행기는 전선 시찰 도중 일본군 암호를 해독하고 대기하던 미군의 P-38 라이트닝 전투기에 격추됐다. 당시 야마모토는 미 전투기에서 쏜 기관총탄에 머리와 흉부 관통상을 당했다.

 일본군은 야마모토의 죽음을 한 달 정도 비밀에 부쳤다가 도쿄에서 국장으로 치렀다. 현재 야스쿠니(靖國) 신사에 그의 위패가 있다. 아직도 때만 되면 야스쿠니 내 전쟁기념관 ‘유슈칸(遊就館)’에선 야마모토를 추모하는 전시회가 열린다. 초기 개전에 반대했지만 야마모토의 비중으로 볼 때 생존했다면 도쿄재판에서 틀림없이 A급 전범이 됐을 것이란 의견이 지배적이다. 아베의 파푸아뉴기니 전몰자비 헌화가 A급 전범이 합사돼 있는 야스쿠니 신사 참배와도 맥을 같이하는 것일 수 있는 까닭이다.

 아베는 이날 파푸아뉴기니 라바울에 지난달 건립된 한국인 희생자 추모탑은 찾지 않았다. 태평양전쟁 당시 징용된 한국인 4400명이 파푸아뉴기니에서 희생됐다. 아키히토(明仁) 일왕 내외는 2005년 6월 사이판을 찾아 일본인 위령비뿐 아니라 한국인 희생자 위령비에도 헌화했었다.

도쿄=김현기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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