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60) 화교 제66화(35)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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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해방후 아서원이 가장 번창한 시기는 휴전직후부터 60년대초까지였다.
휴전후 54년께부터 약2년동안은 주로 미군등 6·25참전 외국군인들이 이곳을 많이 이용했다. 아서원이 도심에 자리잡은데다 많은 사람을 수용할수 있는 대규모 음식점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었다.
특히 주한미군은 아서원을 지정식당으로 정해 각종「파티」와 장병위로연회를 이곳에서 베풀었다. 저넉때면 5백∼6백명씩 전방에서「트럭」을 타고 몰려와 밤새워 먹고 마셨다.
미군당국은 아서원에 대한 위생감독을 철저히 했다. 연회를 열기전에 반드시 미군검사관이 미리 위생검사를 했다. 접시에 음식을 담기 직전에 소독하도록 했고, 물끓이는 온도나 시간도 그들의 기준대로 해줄 것을 요구했다.
종업원의 손이나 칼·도마등 주방용구는 일일이 점검했으며 주방에 파리라도 몇마리 날아다니는 날이면 벼락이 떨어졌다.
엄격한 검사기준에 미달되면 서울시당국을 통해 며칠씩 문을 닫게한 경우도 있었다.
아서원역사상 위생검사에 걸려 잠시라도 문을 닫은 적은 아마 이때밖엔 없었을 것이다.
이렇게 까다롭긴 했지만 미군이 대규모로 팔아주니 경기는 좋았다.
그러나 돈버는 만큼 골치아픈 일도 많았다. 술취한 미군들이 상을 엎으며 주정을 부리는가하면, 끼리끼리 몰려오는 미군들중엔 요리값을 안내고 도망가는 사람도 적지않았다. 종업원이 쫓아가면 마구 총질을 해 위협하곤 달아나는 경우도 있었다. 물론 사람은 쏘지 않았지만 쫓아가던 종업원은 혼비백산해 뛰어들어오곤 했다는 얘기다.
이밖에 바로 뒤 담하나를 사이에 둔 조선「호텔」에 숙박하던 미군들이 양부인과 함께 사닥다리로 담을 넘어와 놀다가는등 웃지못할 일화들이 많았다.
5년대 자유당정부 시절의 아서원은 이름난 사교장소였다. 위치도 서울의 중심지로 시청이나 중앙청·국회의사당등 관가·정가와 가까왔는데다 규모 또한 커서 모임에는 안성마춤이었다.
또 모임이 아니더라도 요리맛이 일품이라 중국음식을 즐기려는 사람들은 꼭 아서원을 찾곤했다. 이때문에 아서원의 단골손님 중엔 사회각계의 저명인사들이 많았다.
단골손님중 작고한 전 한국일보 사장 장기영씨는 화교들의 좋은 친구였다.
장씨는 40년대말 한은 조사부장시절부터 20여년동안 아서원을 드나들면서 정신적 후견인 노릇까지 했었다.
50년대말께의 일이다. 아서원구내에 있던 전주에서 불이나 조그만 소동을 벌인 적이 었었다.
요행히 곧 진화돼 별 피해는 없었으나 이소식을 들은 장씨는 제일 먼저 아서원으로 달려와 피해상황을 물었다는 것이다.
64년 부총리로 입각하기 직전엔 한달동안 아서원에서 자고 먹으며 무언가를 열심히 구상하기도 했다. 아서원에서는 특별히 장씨에게 조용한 방 한개를 내주었다.
장씨는 아서원의 마지막 주인 서도민씨와도 매우 가까운 사이였다. 서씨가 70년 아서원 문을 닫은후 쉬고 있을 때 장씨는 안스러웠던지 어느날 사무실로 서씨를 불러 도와주겠다며 다른일을 시작해 보라고 했다.
마침 서씨는 지병인 당뇨병으로 고생하던 때라 사양했지만, 장씨의 고마운 마음을 잊을 수 없다고 했다.
장씨가 생전에 즐겨먹던 요리는 간패(깐뻬이)와「샥스핀」(상어지느러미), 그리고 왕새우요리 등이었다고한다. 간패는 해삼과 생선등 해물류를 볶은 요리다. 장씨는 또 제비집요리도 구할수 있을때 마다 청해 먹었다고 한다.
재계인사중 단골의 한사람인 고김철호씨(기아산업 전회장)는 독자적으로 중국요리를 고안해 일화를 남겼다.
김씨의 독창적 요리는 통해삼의 속을 갈라 전복·새우등 해물과 갖은 양념을 넣은 것으로「기아 해삼탕」 이라고 이름을 붙였다.
해삼탕을 좋아한 김씨가 스스로 이같은 조리법을 적어주며 그대로 만들어달라고했다. 만들어 보니 과연 맛이좋아 그뒤로 아서원은 물론 다른 큰중국집 「메뉴」에도 정식으로 오르게 됐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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