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문시장 건널목 긋기 14년 줄다리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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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일 대구시 중구 큰장네거리에서 차량 신호가 직진으로 바뀌자 한 번에 30~40명의 시민이 우마차 통행로를 따라 왕복 6차로를 무단횡단하고 있다. [프리랜서 공정식]

5일 오후 대구 서문시장 입구 큰장네거리. 신호가 바뀌면서 차량 통행이 줄어들자 시민들이 왕복 6차선 도로를 가로지르기 시작했다. 흰색 ‘우마차 통행선(자전거·리어카만 통행가능)’을 따라서다.

 30초 후 차량이 다시 밀려들고, 경음기까지 울렸지만 도로를 건너는 발길은 1분 이상 이어졌다. 1시간 동안 큰장네거리를 무단횡단한 시민은 150명 남짓. 한 번 무단횡단이 시작되면 1분 30초 정도 계속됐다. 차량과 시민이 뒤엉켰지만 이를 정리하는 경찰은 없었다. 무단횡단을 하는 이모(21·대학생)씨에게 “불법이 아니냐. 위험하다”고 묻자 “다들 무단횡단을 하는데 이게 불법이냐”고 되물었다.

 이런 일이 벌어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서문시장 입구인 큰장네거리에 횡단보도가 아예 없어서다. 길을 건널 수 있는 방법은 지하상가(대신지하상가)를 이용하는 것. 그러나 수십 계단을 내려갔다가 다시 올라가는 불편 때문에 시민들은 무단횡단을 한다. 사고도 끊이지 않는다. 대구경찰청에 따르면 무단횡단을 하다가 시민이 차에 치이는 교통사고만 큰장네거리에서 2009년 이후 14건이 발생했다.

 하루 3만 명이 찾는 국내 3대 전통시장 중 하나인 대구 서문시장. 이 대형 시장 입구에 왜 횡단보도가 없는 걸까. 사연은 1985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대구시는 민간투자 방식으로 시장 입구에 대신 지하상가를 만들었다. 지하상가가 횡단보도 역할을 대신한다며 상인을 유치했다. 한복점 등 330여 상가가 지하에 들어섰다.

 지하상가가 만들어지고 곧장 문제가 발생했다. 시민들이 지하상가 대신 무단횡단을 시작한 것이다. 계단을 이용하기 불편하다는 시민·장애인의 민원이 빗발쳤다. 2000년 횡단보도를 다시 설치하려 했지만 이번엔 지하상가의 반발에 부닥쳤다. 유동인구가 없어지면 지하상가는 모두 문을 닫아야 한다며 반대했다.

 횡단보도 설치에 대해 시장과 지하상가의 생각은 엇갈린다. 김원일 대신 지하상가 번영회장은 “지하상가 개설 직후 횡단보도 설치 얘기가 있었지만 지하상가 상인을 위해 만들지 못한 것이다. 횡단보도가 있으면 누가 지하로 내려오겠느냐”고 말했다. 반면 서문시장 상인 권모(51)씨는 “3000여 상가가 있는 시장이다. 짐을 든 사람도 많은데, 지하상가만 이용하기에는 불편이 따를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대구시와 경찰은 여전히 책임 미루기에 급급하다. 대구시는 횡단보도 설치는 경찰 책임이라며 발을 빼고, 경찰은 대구시가 나서서 지하상가를 설득해야 횡단보도를 설치할 수 있다는 입장만 반복한다.

 해결 방법은 없는 걸까. 서문시장 상인들은 2012년 대구시가 계획한 지하상가 리모델링 사업을 하면 된다는 입장이다. 당시 대구시는 지하상가를 새롭게 꾸미고, 거기에 엘리베이터와 에스컬레이터를 설치하면 무단횡단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의견을 냈었다. 그러나 100억 원 이상 돈이 드는 사업이어서 2년째 계획만 존재할 뿐 실제 추진되지는 못하고 있다. 지하상가 상인들은 오는 9월께 대구시에 지하상가 리모델링 사업 추진을 다시 요청할 방침이다.

김윤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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