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일 것도 갈 곳도 없어 지루한 「어린이 방학」|공연단체·문화시설 활용할 수 없나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5면

내가 아이들에게 쓰는 말의 가지 수는 얼마나 될까하고 요즈음 생각하게 된다. 『공부 좀 해라』 『길조심 해라』로 간추려지는 말을 나는 가장 많이 해온 것 같다.
이 말들을 계속적으로 하면 아이들은 별 탈없이 잘되리라고 믿어온 모양이다.
국어사전에 실려있는 낱말의 수효가 수십만 개를 넘고 있는데 비하면 엄청나게 적은 수효다. 자식을 위하는 나머지 하는 말이 『공부 좀 해라』 『길조심해라』 뿐이었다는 사실에 놀란 데는 이유가 있다.
지금은 방학이라 아이들은 학교에 가지 않는다. 따라서 『공부 좀 해라』 『길조심 해라』는 별로 쓰지 않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보니 아이들에게 할 말이 없다. 『실컷 놀아라』하고 싶지만 이 말이 공부하라는 말처럼 쉽게 자주 나오지 않는다. 『놀아라』하면 『놀게 해주어야하지 않느냐』는 말이 곧장 뒤따라 나올 것만 같고, 그렇게 되려면 적지 않은 부모의 성의가 따라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니 공부해라는 말이 얼마나 무성의한 말이었는지 알 수 있다.
방학이 되어 실컷 놀리려니 놀릴 방법이 없다. 방학을 이용해 평소에 하지 못하던 문화실습도, 여행을 시켜 견문을 넓혀주라고 교육자들은 말하지만 마땅히 데리고 갈곳이 없다. 책을 읽힌다.
하루에 한 권씩 읽어 젖히니 책값을 대기도 쉽지 않고 또 계속 책만 읽으랄 수도 없다.
조립식 장난감 만들기도 그렇다. 영화라도 보여주려고 신문광고를 뒤적여본다. 미성년자 불가를 제외하고 나면 『○○함대』 『○○소년』 식으로 요란스런 만화영화가 대부분이다. 문화영화라도 상영하여 준다면 좋겠다. 지난봄 중학교 1학년 딸아이를 감격시킨 이순신 장군의 영화를 지금쯤 상영한다면 국민학생인 두 아이를 데리고 가련만….
국민학교 6학년 맏아들아이가 4학년인 동생과 용돈을 함께 모아 산 축구공이 아직 새 것인 채 그대로 있다.
마음껏 공을 찰 마당이 없는 것이다. 그런데도 국민학교의 넓은 운동장은 비어 있고, 교문은 굳게 잠겨져 있다. 저녁밥을 먹고 난 다음 아버지와 「아들이 팔씨름이나 하는 정도라도 힘을 빼지 않으면 남는 힘을 빼어 처리할 재간이 없다. 이럴 때 우리의 국립이나 서울시립 교향악단이 그들의 높은 무대를 버리고 학교운동장에 와서 아이들이 즐겨 들을 수 있는 쉬운 교향곡쯤이라도 들려주었으면 좋겠다.
해어진 돗자리를 깔고 옹기종기 모여 앉아 별을 보면서 음악을 듣는 것도 좋으려니와 국민의 세금으로 운영되는 교향악단이 어린이들을 위해 연주한다는 사실이 아이들을 기쁘게 만들어줄 것이기 때문이다.
미국 대통령 딸 「에이미」를 기쁘게 만든 국립국악원도 이럴 때쯤 공개하여 우리의 전통음악과 악기를 어린이들로 하여금 가까이 에서 접할 수 있게 만들어 주는 것도 좋을 것 같다. 세계수준의 문화시설을 만드는 것도 좋다. 그러나 이미 우리가 확보한 기존 문화시설 까다롭지 않은 조건으로 공개하여 어린이들로 하여금 활용시키는 것이 최소한 방학동안만이라도 바람직할 것 같다. 마침 아이들이 좋은 「뉴스」를 가지고 왔다. 국립과학관에서 주최하는 공개 과학교실에 가게 해 달라는 것이다.
스무 가지가 넘는 이야기 거리가 있을 것이라고 벌써부터 야단이다.
아이들의 흥분과 반대로 문득 성가시다고 느껴지는 내 자신에 깜짝 놀란다.
무더운 날씨에 그 애들을 데리고 가야할 것도 번거롭지만 공부하라고 말하는 것으로 부모의 책임과 성의를 다한 양 생각해온 내자신의 게으름 때문이리라.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