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명수 전문기자의 은퇴 성공학] 은퇴한 아빠의 실상부터 알려라

온라인 중앙일보

입력

얼마 전 한 60대 남성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결혼한 자식이 부모한테 주는 용돈에 관한 이야기였다. 중앙일보 재산 리모델링 코너에 나온 기사에 부모한테 용돈을 얼마 준다는 내용이 들어가는데, 그걸 볼 때마다 화가 난다는 것이었다. 자초지종을 들어봤다.

“저는 10년 전 퇴직해 지금은 집에서 쉬고 있습니다. 아내와는 40년 전 만나 자식 둘을 두었죠. 지난해 모두 결혼해 분가시켰습니다. 아내와 나 둘만 남게 된 거지요. 남들은 둘이 오붓하게 부부의 정을 되새기면서 손자 볼 일만 남아 좋겠다고 하는군요. 그런데 둘만 있다고 가까워 지는 건 아니더라고요. 퇴직 후 아내가 나를 소 닭 보듯 하는 건 자식들을 결혼시킨 다음에도 변하지 않아요.

나는 가까워지고 싶은데 성격과 취향이 다르다 보니 자주 티격태격합니다. 어떤 때는 가족을 먹여 살리느라 평생 뼈빠지게 일한 나를 이렇게 홀대할 수 있나 야속하다는 생각도 해봅니다. 난 그저 돈 벌어다 주는 기계에 불과한 게 아니었는지 서글퍼집니다. 말하기 창피합니다만 현실이 그렇습니다. 우리 세대는 자식이라는 짐을 내려놓고 한숨 돌렸다는 자체에 만족하며 살아가야 하는 가 봅니다.

그런데 아내보다 더 큰 불만이 있습니다. 자식들이 나를 대하는 게 영 맘에 들지 않아요. 나를 실체가 없는 아내의 그림자쯤으로 여기는 겁니다. 집안 대소사가 닥쳤을 때 아버지의 자리는 더 이상 없습니다. 자식과 며느리는 모든 걸 아내와 의논합니다. 심지어 내 생일 때도 아내와 상의하더군요. 저녁은 어디서 하며 메뉴까지 아내가 정합니다.

저녁 자리에서 며느리가 건네는 봉투도 아내의 손에 들어갑니다. 그러면서 두 분이 여행이나 다녀오라고 합니다. 하지만 나는 여행을 별로 좋아하지 않아요. 그래서 그 봉투 안에 얼마 들었는지 모르지만 절반씩 나누자고 했습니다. 생일을 맞은 나한테 준 축하금인데, 그 정도면 많이 양보한 거 아닙니까. 그랬더니 아내는 안 된다며 딱 자르더군요. 오히려 여행도 못 가게 한다며 서운하다고 말합니다.

남편의 용돈을 사치로 생각

자식들은 우리가 사이 좋게 잘 지내기 바라는 모양입니다. 같이 살 때 저희들 문제로 부부싸움을 하는 걸 자주 목격해 그러는 것 같아요. 하지만 둘만 남았다고 갑자기 알콩달콩 지내기가 어디 쉬운 일인가요. 황혼에 접어든 나이에 싸우고 부닥칠 게 뭐 있느냐는 거에요.

자식들 키우고 출가시켰으니 이젠 마음 편히 재미있게 살면서 서로를 아끼고 보살펴 주라고 합니다. 하지만 자식들이 모르는 게 하나 있습니다. 남자가 은퇴하면 가정의 권력은 아내에게 넘어간다는 사실 말이에요. 부부관계의 주도권도 아내가 쥐게 됩니다. 사이가 좋아지고 나빠지고 하는 건 아내의 마음이 절대적입니다.

자식들은 용돈으로 쓰라며 매달 얼마씩 보내옵니다. 첫째, 둘째 모두 30만원씩입니다. 그런데 이 돈은 몽땅 아내 통장으로 들어갑니다. 자식들은 분명히 부모가 공평하게 나눠 쓰라는 건데 용돈을 받는 주체는 아내 혼자죠. 나의 용돈 관리는 아내가 합니다. 필요할 때마다 얼마씩 타다 씁니다만 그럴 때마다 잔소리를 듣게 됩니다. 집에서 노는 사람이 웬 용돈을 그렇게 자주 요구 하느냐고요. 자식들이 부모가 함께 쓰라고 주는 용돈을 시혜라도 베풀 듯이 생색을 내는 건 무슨 경우냐고 따지고 싶지만 참고 넘깁니다.

용돈 몇 만원 가지고 다투는 게 싫습니다. 자식들한테 내 용돈은 따로 보내달라고 이야기하고 싶었죠. 자식 키운 보람 같은 것을 나도 똑같이 누릴 자격이 있지 않습니까. 하지만 치사하다는 생각이 들어 그만 뒀습니다. 저희들이 알아서 30만원씩 나와 아내 통장에 각각 넣어주면 가장 좋으련만 눈치가 거기까지 돌아가지 않네요.

더구나 이런 얘기를 하면 우리 사이에 큰 일이라도 생겼나 걱정할 수도 있고요. 젊은 부부를 만나면 정말 당부해주고 싶은 게 있습니다. 부모님 용돈은 따로 보내라고요. 죽을 때까지 꼭 필요한 건 아내의 잔소리 안 듣고 맘 편히 쓸 수 있는 용돈입니다.”

은퇴하고 나면 아쉬운 것 중에 하나가 용돈이다. 용돈의 사전적 의미는 특별한 목적에 구애 받지 않고 자유롭게 쓸 수 있는 돈이다. 은퇴하고 나서도 친구 등 인간관계를 유지해야 하고 취미생활도 해야 하기 때문에 용돈은 여전히 유효한 존재다. 하지만 소득흐름이 확 줄어드는 마당에 현역시절처럼 용돈을 풍족하게 쓰기 힘들다. 비자금을 모아놓지 않은 이상 자식들의 지원을 받아 쓰는 경우가 많다.

문제는 앞의 사례에서 보듯이 자녀의 지원 통로를 아내가 독점한다는 데 있다. 남편은 아내를 거쳐 간접 지원을 받는 식이다. 이는 가정에서 자녀를 키우는 데 엄마의 역할이 절대적이라는 점과 관련이 있다. 용돈도 엄마한테 타다 쓴다. 아버지는 자녀 문제에 관한 한 국외자나 다름없다. 회사 일에 쫓겨 집안 일에는 신경 쓸 여유가 없어서다. 우리나라 특유의 가부장적 문화로 자녀와의 대화조차 뜸하다.

자녀의 머릿속엔 아버지는 돈 벌어오는 사람, 엄마는 그 돈으로 살림을 꾸려가는 사람으로 박혀 있다. 아버지가 은퇴한 후에도 이런 생각은 지워지지 않는다. 자녀가 은퇴한 부모에게 용돈을 줄 때 왜 엄마를 매개로 하는지 그 이유가 대충 밝혀졌다. 하지만 아내는 남편만큼 용돈의 필요성이 크지 않다. 자녀가 보내준 용돈을 살림에 보태 쓰라는 것으로 받아들인다. 은퇴 가정의 경제권을 쥔 아내에게 남편의 용돈은 어쩌면 사치일 뿐이다.

비자금은 남편과 부모로서의 권위 높여줘

용돈 문제 해결은 물론 재취업이나 창업을 통해 독립적 경제력을 키우는 게 가장 빠른 길이다. 현역 때 틈틈이 비자금을 조성해 노후에 쓸 용돈 재원을 만들어 놓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만약 비자금을 만들지 못했다면 자녀에게 의지할 수밖에 없다. 이때 평소 자녀와 대화기회를 자주 갖고 은퇴한 아빠의 실상을 정확히 알리는 게 중요하다.

서명수 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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