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사제의 부음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1면

윤형중신부는 종교인으로 보다는 논객으로 더 많이 알려져 있었다. 문필을 통해 혹은 담론으로
그는 언제나 칼날같은 예지를 번뜩였었다.
한때 그야말로「낙양의 지가」를 올렸던 함석헌옹과의 종교논쟁은 곡직을 가리기에 앞서 사회
적으로 종교에의 관심을 불러일으킨 점에서도 높이 평가되었다. 논쟁이란 어느 경우나 그 자체가
계몽적인데에 뜻이 있다.
학문의 역사를 보아도 끊임없는 논쟁속에서 새로운 경지가 열리고 또 발전을 도모할 수 있었
다.
윤신부의 종교논쟁이 벌어졌을 무렵, 우리사회는 전후의 침체속에서 많은 사람들이 정신적인
방황을 하고 있었다. 종교도 그당시 양적인 팽창에만 집착한 인상이었다.
그러나 윤신부의 종교논쟁은 그런 상황에 찬물을 끼얹어 주었다. 모든 위선자들에게 하나의 경
종을 울려준 셈이 됐었다.
그 무렵 종교에 귀의한 지식인 혹은 지도층 인사들이 특히 많았던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빛
과 소금」과도 같았던 그의 논설은 우리사회의 도덕적인「에토스」를 제시해 준것이기도 했다.
1903년 중북진천태생. 4대째의「가톨릭」가문에서 태어나 27세에 사제(신부)가 되었다. 노기남
대주교와는 신학교 동기로 잠시 그의 주변에서「브레인」역할도 했었다.
그러나 그의 본령은 줄곧 문필에 있었다.
교회출판사를 비롯해 한때는 신문사의 경영도 맡았었다. 정치적 혼돈기엔 권총을 차고있는 사
람과 언론의 현장에서 추상같은 언변을 토로하여 담판을 했던 일도 있었다.
「우회」보다는「직설」을,「레토릭」(수사) 보다는「논리」를, 「타협」보다는「정도」를 더
존중했던 그는 만년을 퍽 고적하게 보냈다.
종교인의 생활이 으레 그런 것이긴 하지만 차라리 은둔을 택했던 그의 심정은 가히 헤아릴 수
있을 것도 같다.
「가톨릭」교회안에선「만년야당」으로 통했던 그의 성품이 한결 돋보인다.
그러나 어느 교파의 입장을 떠나 그는 우리 사회에 종교적인 기풍을 진작하고, 신앙의질을 심
화시킨 사제로서도 유감없는 삶을 누렸다. 사실 그는 모든 종파의 사람들과 어울리기를 거부하지
않았었다. 이것 만으로도 그는 독선적인「교파인」이기보다는 독실한 「종교인」이었다.
그의 부음을 들으며 어딘지 적막감이 드는 것은 그런때문일 것이다. 우리 사회는 지금 소금과
빛을 더욱 더 갈망하고 있는 것이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