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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병이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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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명복
배명복 기자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배명복
논설위원·순회특파원

‘준비된 여성 대통령’은 사실이 아니었다. ‘국민행복시대’를 약속했지만 국민이 체감하고 있는 것은 ‘국민불안시대’다. 세월호 참사와 인사 참사를 겪으며 국민은 박근혜 정부 위기대응 능력의 초라한 실체를 확인했다. 세월호 참사보다 더 큰 안보위기나 경제위기가 없기만을 바라는 것이 비단 나만의 염원일까.

 주변 정세도 불안하다. 김정은이 쏘아올린 탄도 미사일의 포물선 아래서 북한과 일본은 밀회 중이다. 아베 정권은 과거사의 족쇄를 풀어헤치고 위험한 칼춤을 추고 있다. 위안부 동원의 강제성을 인정한 ‘고노담화’를 무력화한 데 이어 집단적 자위권을 앞세워 노골적인 군사대국화 행보를 가속화하고 있다. 저 멀리 이라크에서 들려오는 종파분쟁의 폭발음에 놀란 미국은 우왕좌왕하고 있다. 중동과 우크라이나의 화약 냄새가 언제 이쪽으로 날아올지 모를 만큼 동중국해는 일촉즉발의 긴장에 휩싸여 있다. 이 판국에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이 부부 동반으로 화려한 한국 행차에 나선다는 자체가 사뮈엘 베케트의 부조리극 같다.

 집권 1년4개월 만에 박 대통령은 국정운영의 동력을 잃었다. 스텝이 완전히 꼬여 있다. 세월호 참사 초동대응 실패의 일차적 책임을 물어 해경을 해체했지만 인사 참사에 대해서는 정반대의 처방을 내놓았다. 같은 원칙을 적용했다면 청와대 인사위원회를 해체하고, 그 책임자인 김기춘 비서실장을 경질했어야 마땅하다. 하지만 인사수석실을 신설함으로써 되레 김 실장에게 힘을 실어줬다. 그러니 해경이 ‘취중진담(醉中眞談)’을 빙자해 집단항명에 나서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적을 향해야 할 총구를 아군에게 돌려 멀쩡한 병사가 다섯씩이나 죽어나가는 이 초현실주의적 상황을 군대 문화 탓으로만 돌릴 수 있을까. 거짓말을 밥 먹듯 하는 군을 어떻게 믿고 자식을 군에 맡기고, 국민의 생명을 지키는 최후의 보루로 군을 신뢰할 수 있는가. 초전박살에 원점타격을 만트라처럼 외치는 무장(武將)을 청와대 국가안보실장에 앉혀 과연 나라의 안전을 도모할 수 있을까. 국가안보는 군사력만으로 담보되는 게 아니다. 외교가 먼저고, 무력은 최후의 수단이다.

 그렇다고 외교인들 온전한가. 알맹이보다 겉모양을 앞세우는 ‘포장외교’가 대통령의 눈을 흐리고 있다. 한·일 관계가 돌이킬 수 없는 국면으로 치닫고 있는데도 아베 탓만 하며 손 놓고 있는 게 지금의 외교팀이다. 북한이 언제 추가 핵실험을 하고, 장거리 미사일을 쏠지 알 수 없는 위중한 상황이지만 중국만 바라보며 팔짱을 끼고 있다. 담대하고 창의적인 이니셔티브로 국면을 타개하려는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외교부 장차관이 연설문과 기고문을 모아 무슨 치적이나 되는 양 책이나 내고 있을 때인가. 하기야 대통령부터 순방외교의 화려함에 도취해 있으니 외교부 장차관 탓만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국가 백년대계인 교육을 책임져야 할 사람은 온갖 부정과 비리 의혹에 시달리고 있다. 논문 표절만 도대체 몇 건인지 모른다. 그런 사람에게 어떻게 우리 자식들의 미래를 맡길 수 있나. 경제민주화는 대통령의 대표 공약 중 하나였다. 그걸 앞장서서 무력화하고, 부동산을 통한 경기 부양에 골몰하는 사람이 경제부처 수장이 됐을 때 과연 이 나라 경제는 온전하게 굴러갈까.

 대통령부터 정신을 차려야 한다. 가슴에 손을 얹고 자신을 돌아봐야 한다. 뭐가 잘못됐는지 찬찬히 따져봐야 한다. 잘못은 다른 데 있는 게 아니다. 새누리당 상임고문인 박관용 전 국회의장이 본지와의 인터뷰에서 고언한 대로 ‘대통령병’ 때문이다. 대한민국의 모든 일이 자기 책임하에 이루어져야 한다고 믿는 과욕, 통일 대통령이 돼야 한다는 강박, 나는 국정을 잘 수행하고 있는데 언론과 홍보팀이 문제라는 착각에서 하루빨리 벗어나야 한다.

 그리고 입은 닫고, 귀는 열어 남의 말을 들어야 한다. 자신의 한계를 겸허하게 인정하고 각계 의견을 경청해야 한다. 아침과 저녁, 필요하면 밤 시간까지 쪼개 사람들을 만나야 한다. 생각과 색깔이 다른 사람들 얘기도 들어야 한다. 또 책임과 권한을 과감하게 아래로 넘겨야 한다. 사표가 수리된 총리를 돌려막기로 주저앉힌 것은 박 대통령이 보여준 비정상적 국정운영의 클라이맥스였다. 그래도 돌이킬 수 없는 일이라면 그에게 힘을 실어줘야 한다.

 야당도 박 대통령을 그만 흔들어야 한다. 정략적 목적으로 대통령에게 돌을 던질 한가한 상황이 아니다. 그러기엔 나라의 처지가 너무 위태롭다. 나라가 있고 나서 정치도 있고, 개인의 삶도 있다. 아무리 한심한 정부라도 일단 정신을 차리고, 안정을 되찾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 국정의 동반자인 야당의 책임 있는 자세다.

배명복 논설위원·순회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