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쟁의 조정역 유엔사무총장|강대국 이해 얽힌 문제엔 한계성 뚜렷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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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발트하임」「유엔」사무총장의 서울 및 평양 방문계획을 두고「유엔」외교 가에서는 『50년 6월 북한남침 때「유엔」군파병을 결의한 안보리의 조치이후 처음 있는 새로운 사태발전이며 최근의 남북대화재개 시도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평가와 함께 『국제분쟁조정의 한계를 드러낸 과거의 경험으로 봐서 이번 방문도 상징적인 의미이상은 없을 것』이라는 엇갈린 반응을 나타내고 있다.
「유엔」사무총장의 권한은『세계평화와 안전보장에 위협이 된다고 판단하는 어떤 문제라도 안보리에 주의를 환기할 수 있다』는 「유엔」헌장 제99조에 근거한다. 사무총장이 직접 국제분쟁에 개입하여 중재를 시도하는 것은 대체로 ①총회·안보리·기타 전문기구의 위임결의가 있는 경우 ②분쟁당사자가 서로 합의하여 중재를 요청하는 경우 ③「유엔」정신에 의해 사무총장 자신이 자기 재량으로 개입하는 경우 등 세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이번 남북대화문제에 대한 총장의 개입계획은 지금까지는 「발트하임」자신의 재량으로 구성된 것으로 알려졌다.
「유엔」창설 이후 현재까지 사무총장이 직접, 혹은 간접적으로 개입하여 분쟁이 해결된 경우를 살펴보면 강대국의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대립하는 분쟁에서는 성과를 거두지 못해 사무총장의 분쟁조정의 한계를 드러내고 있다.

<중·월 전쟁 때는 형식적인 토의만>
예컨대 한국전쟁·월남전쟁·중동사태 등에서는 사무총장의 역할이 거의 미미했다.
특히 최근「베트남」의 「캄보디아」침공, 중공의「베트남」무력침공사태에서는 사무총장 자신이 강대국의 눈치를 살피느라고, 효과적인 해결책을 마련하지 못했다. 중공「베트남」전쟁 때는 거의 2주일이 지나도록 아무런 조치를 못하다가 서방 3개국의 안보리 소집요구 안을 받고서야 형식적인 토의를 했을 뿐이다.
비록「유엔」이나 사무총장의 기능이 한계를 가지고 있다해도「조용한 외교」, 혹은 「예방외교」라고 특정 지어진 사무총장의 분쟁조정노력은 중대한 본질문제가 아닌 분야에서는 조종 효과를 거두었다.
한국전쟁이 후전 된 이후 미국의 요청을 받은「유엔」총회는 중공이 억류하고 있는 미군조종사들의 석방을 결의했었으나 당시 비 회원국이었던 중공은 총회의 결의를 전혀 인정할 수 없다며 석방을 거부했다.
초대「트리그브·리」총장의 뒤를 이어 취임한「다그·하마슐드」총장은 직접 중공과 접촉하여 석방동의를 얻어냈는데 이때의 권한행사는 총장의 자발적인 재량의 발휘였다.
1956년10월「수에즈」운하 분쟁으로 영국이 출병까지 하는 사태가 일어났을 때 「하마슐드」사무총장은「이집트」「프랑스」영국외상들과 각각 개별접촉 해 분쟁해결의 원칙을 마련하여 안보리에 승인을 요청했다.
58∼59년과 62∼64년 두 차례에 걸쳐「캄보디아」와 태국이 국경분쟁을 일으켰을 때 당시의「우·탄트」사무총장은 분쟁조정에 나섰다.
「우·탄트」는 양국정부와 절충하여「유엔」의 해결방식에 따르도록 동의를 얻어냈다.
「우·탄트」는 68년8월 사무총장의 특사로「허버트·드·리블링」을 파견하는 문제를 안보리에서 통과시켰다.
「키프로스」사태를 해결하기 위한「우·탄트」총장의 노력도 높이 평가되고 있다.
1963년12월 이후 일어난「그리스」계의 충돌은 유혈사태로 발전했다. 「유엔」안보리는 『「유엔」평화유지군』(UNFICYP)의 창설을 「키프로스」정부의 양해하에 만장일치로 결의(1964년 3월)했는데 평화유지군의 조직과 규모 등은 「우·탄트」총장이「키프로스」「그리스」「터키」영국정부와 협의하여 결정토록 위임했다.

<개인특사까지 보낸 우·탄트 총장>
「우·탄트」는 자기 개인특사를「키프로스」에 보내 분쟁조정에 나섰다.
「유엔」사무총장의 분쟁조정노력이 제한적이라는 점이 가장 잘 드러난 경우는 67년 6월 중동전쟁발발에서 볼 수 있다. 그해 5월「이집트」를 주축으로 하는 통일「아랍」공화국은「유엔」비상군의 철수를 요구했는데 당초「아랍」축과 「이스라엘」축의 동의에 따라 파병된 「유엔」군은 어느 일방의 철수요청을 거부할 법적인 근거가 없었다.
「우·탄트」총장이 직접「카이로」로 달려가서 중재에 나섰으나 소득이 없었다. 「유엔」비상 군이 철수한 직후 6월 5일「이스라엘」과 통일「아랍」공화국「요르단」「시리아」간에 중동전이 터졌다.
「발트하임」총장이 깊이 개입된 최근 노력중의 하나는「나미비아」문제였다.
남「아프리카」공화국과「스와포」(SWAPO·서남「아프리카」인민기구)간의 오랜 유혈사태를 종식시키기 위해 서방측은 「발트하임」과 긴밀한 협조관계를 가지고 있다.
「발트하임」총장은 남「아프리카」공화국과 「스와포」대표와 직접 접촉하여「나미비아」에서 남「아프리카」공화국 군이 철수하고「유엔」군이 들어가「유엔」감시 하에 자유 총선을 실시한다는 원칙을 마련했다.
그러나「앙골라」에 기지를 둔「스와포」「게릴라」들이 계속 활동을 하고있어 남「아프리카」측에서는 「유엔」군이「앙골라」내의「게릴라」까지도 감시해야 한다는 새로운 주장을 하는 바람에 타결 직전에서 결렬위기에 놓여있다.

<「유엔의 무능」씻으려는 시도로>
「발트하임」의 남북한방문계획을 두고「유엔」외교관들은「발트하임」총장의 역할이 상징적인 의미이상의 무엇이 있느냐에 대해 의문을 나타내고 있다.
그 이유는 박 대통령의 1월19일 제의이후 남북한이 대화를 재개해야 한다는 입장을 피차 밝혔고「유엔」사무총장이 개입해야 할만큼 교착상태에 빠진 것도 아니라는 점을 들고 있다. 일부 외교관들은 최근「카터」대통령이 중동사태를 극적으로 타결한데 자극을 받은「유엔」사무총장이 세계에 남아있는 분쟁지역의 하나인 한반도를 방문함으로써『「유엔」의 무능』이라는「이미지」를 씻어보려는 시도가 아닌가 해석하기도 했다.
50년대 이후의 냉전사와 북한의 잇단 도발에도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아니했던 과거의 예가 입증한다는 것이다. 만약「발트하임」총장이 서울과 평양을 방문하여 남북대화재개에 어떤 돌파구가 마련된다면「발트하임」총장으로서는 그 이상의 성과는 없을 것이며 아무런 성과가 없다고 해도 세계여론을 환기시켰다는 점에서 의의를 찾을 수 있으며「유엔」사무총장으로서는 손해가 아니라는 설명이다.
남북한은 함께「유엔」사무총장에 대해 수년 전부터 초청장을 내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것이 남북한의 묵시적인 개입요청으로 까지는 확대해석 될 수 없지만「발트하임」총장이 자기재량으로 시기를 선택하여 방문의사를 밝혔을 때 거부할 수 있는 명분도 없다.
그러나「발트하임」총장의 방문으로 한반도 문제가「유엔」으로 옮겨진다거나 새로운 한반도 결의안이 나올지도 모른다는 추측은 성급하다고「유엔」외교관들은 말하고 있다.【뉴욕=김재혁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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