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00)|<제63화>민주당시대(40)-끝내 분당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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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60년9월 중순 구파의 신당작업이 본격화 됐다. 첫 작업이 발기준비위원 서명공작.
그러나 정국안정을 위해 신파와 합작하자는 민관직 이충환 의원 등의 분당에 난색을 보였고 이민우 박해충 의원 등도 이에 동조했다.
소선규 신각휴 의원 등 김도연 박사 직계이며 분당 적극론자들이 합작파를 제거하려고 달려들어 한차례 진통이 불가피했다.
이들 강경파는 신파와 합작을 주장하는 사람들을 즉각 제명하고 즉시 분당하자는 입장이었다. 강경론자 중에 유옥우 의원 같은이는 합작파를 공격, 신파에서 한사람 앞에 1천만원씩 뿌린다는 얘기로 벌집을 쑤셔놓아 수습하느라 진땀을 뺀 일이 있다.
신당운동에 긍정적이고 김박사 직계인 소위구파 골수들이 신당의 주도권을 잡을까봐 자체 내에 견제 「그룹」이 생겨났다. 서범석 유청 김영삼 박준규 오상직 의원 등이 여기에 속한다. 이들 중에 「담수회」라는 별도 「서클」을 만들어 활동한 사람도 있다.
진산은 장면정권의 안정을 위해 떨어져 나갈 사람은 신당에 참여하지 말고 미리 떨어져 나가라고 했대서 구파내부의 비난을 받은 일이 있다. 그러나 이런 결정은 진산의 단독결정이 아니라 구파 대다수의 의견이었다. 김도연 박사는 기회 있을 때마다 『장 정권을 뒤엎을 생각은 추호도 없다. 그러나 신파에 가담할 사람은 서슴없이 가도록 하자』고 말했던 것이다.
혼란한 치안상태·각종 「데모」·신파 내 소장들의 움직임 등으로 장 정권이 오래가지 못할 것이란 짐작을 하는 사람이 없지는 않았으나 당장 도각 공작을 한다는 것은 생각하지 않았다. 다만 너무 비대해 전 민주당 하나만으로 집권을 계속해 나가는 것보다는 건전한 제1야당으로 갈라져 평화적인 정권교체에 대비하자는 게 신당발기의 취지였다.
신파에서는 합작파 사람들과 접촉을 빈번히 했다. 10월19일 밤에는 장 총리가 직접 이들을 초청하여 원내안정세력의 확보를 역설했다. 민관식 이병하 김판술 곽태진 김명윤 박해충 의원 등 18명이 참석했다.
이들 합작파 중에는 총리인준 때부터 내용적으로는 이미 신파쪽으로 가 있는 사람이 있었고 장관자리를 교섭 받았거나 기대하고 간 사람도 있었다.
11월8일 시내 진명여고 「삼·일당」에서 열린 발기준비대회에는 3백21명이 참석했는데 국회의원 중에서는 민의원 62명, 참의원 17명이 나왔다.
그동안 준비는 김도연 유진산 양일동 의원 등이 주로 맡았고 나도 「멤버」의 한사람이었다. 준비과정에서 이런 일이 있었다.
신당의 당명을 무얼로 할 것이냐를 놓고 연구하던 끝에 양일동 의원이 「신민당」이란 이름을 내놓았는데 이게 논란거리가 됐다.
이런 이름의 정당이 이북에도 있다고 김도연 박사부터 달갑지 않게 생각했다. 나도 「신민」이라면 모택동이 제창한 신민주주의로 해석될 수도 있지 않겠느냐며 이를 반대했다.
양 의원은 『이북에 있다고 문제삼으면 김박사는 이북에 같은 김해김씨인 김일성이 있는데 김씨라고 할 수 있느냐』고 억지설득을 하고 유진산 윤제술 이상돈씨 등을 차례로 설득하여 「신민당」이 채택됐다. 「신민」은 과거 민주당이 아니고 새로운 각오로 출발하는 민주당이란 정도로 뜻풀이를 하고 그럭저럭 넘어갔다.
양 의원이 교수들의 협조를 얻어 만들어온 신당정강·정책에 남북협상 등 너무 혁신적인 대목이 많다하여 말이 많았다. 양 의원은 『민주당하고 똑 같을 바엔 뭣하러 당을 다시 만드느냐』고 고집했으나 원로들에 의해 많이 삭제됐다. 장차는 몰라도 지금 당장에는 내치의 견고한 기반구축이 무엇보다 급선무라는 의견들이었다.
정식 창당대회야 이듬해인 61년2월20일이었지만 준비대회서부터 당수에는 김도연 박사, 간 사장에 유진산, 원내총무에 양일동씨로 돼있었다.
백남훈 선배를 당수로 옹립하려는 측이 있었으나 백씨는 『나는 협조자로서 만족하겠다』며 스스로 양보했다. 그는 김 박사 중심으로 뭉칠 것을 역설하면서 『김 박사의 나이도 이젠 보통나이가 아니다』고 김 박사 걱정을 해주었다.
신파에서는 구파내의 동요자들을 꾸준히 포섭하여 신민당이 발기된 후에는 구파 사람 중에 20여명을 포섭하여 안정세력을 형성했다. 신민당이 갈라져 나올 때쯤 의원 내 의석은 민주당 1백25, 신민당36, 민정구36, 순무소속10명의 분포를 보였다.
민주당의 의석은 1백17명 과반선을 8명 초과하는 정도로 크게 안심할 것은 못되었다.
새로 만든 신민당의 간부들은 다음과 같았다.
부위원장=신각휴 안동원, 총무부장=조한백, 조직=김의택, 선전=이상돈, 재정=전용순, 섭외=박준규, 노농=정성태, 어민=정해영, 문화=이원만, 부녀=곽경봉, 청년=김영삼
신민당은 민주당의 포섭공작 등으로 여러 고비를 치르느라 중앙당창당대회가 늦어졌다.
그사이에 도지사선거가 있어 각도단위는 선거준비를 위해 스스로 도당준비위원회를 결성했다. <계속> 【김성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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