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대현 교수의 스트레스 클리닉] 속상한 일 있으면 사탕 쌓아놓고 먹는다는 29세 여성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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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29세 미혼 여성입니다. 전 단것을 너무 좋아합니다. 특히 일이 잘 안 풀리거나 속상한 일이 있으면 단것에 더 집착합니다. 정말 심할 때는 차와 사무실에 사탕과 초콜릿을 잔뜩 쌓아 놓고 밥 대신 계속 먹습니다. 그러다 보니 치아에 문제가 생기고 소화가 잘 안 될 때도 많습니다. 친구들은 차라리 술로 스트레스를 풀라 하는데 술은 전혀 못합니다. 단것 중독인 것 같아 억지로 끊으려 했더니 엉뚱하게 피우지도 않던 담배를 하루 세 갑이나 피우게 되더군요. 지금은 자포자기로 그냥 단 것을 흡입하고 있습니다. 혹시 저 설탕 중독인가요.

A 설탕이 마약도 아닌데 무슨 중독이냐고요. 아닙니다. 설탕에도 중독될 수 있습니다. 중독이란 단어는 나쁜 어감이지만 사실 우리를 중독시키는 건 생존에 절실하게 필요한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절실하기 때문에 엄청난 쾌감을 일으키는 거죠. 유명한 해외 골프 선수가 섹스 중독 치료를 받았다는 기사, 기억하시죠. 섹스에 중독됐다는 건 그만큼 섹스가 쾌감을 준다는 겁니다. 쾌감을 주지 않으면 아무도 사랑을 나누지 않을 것이고 인류는 2세를 만들 수 없어 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문제는 섹스의 쾌감 자체가 아니라 지나치게 탐닉하는 겁니다. 이렇게 되면 삶이 망가질 수 있기에 섹스 중독 치료를 받는 겁니다.

 설탕 역시 생존을 위해 매우 소중한 것입니다. 심장이 뛰어도 뇌가 죽으면 살아있다고 보기 어렵겠죠. 그 소중한 뇌가 주요 에너지원으로 활용하는 게 당분입니다. 아침에 달달한 커피 한 잔 해야 머리가 돌아가는 느낌이 드는 사람이 적지 않을 텐데요. 달달한 당분이 덜 깬 내 뇌에 시동을 거는 셈입니다. 이렇게 중요하기에 우리 뇌는 달콤한 설탕에 강렬하게 반응합니다.

 얼마나 강력하게 반응하는지는 위의 뇌 사진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설탕을 먹었을 때와 코카인을 흡입했을 때의 뇌 영상 사진이 꽤 유사하죠. 연두색으로 환하게 보이는 것이 도파민이 분비돼 뇌의 쾌락 시스템이 활성화한 모습입니다. 설탕 먹을 때도 마약을 했을 때 만큼 이렇게 쾌감을 느끼게 하는 도파민이 콸콸 쏟아집니다. 쾌감이 크니 당연히 중독 가능성이 있겠죠.

 중독을 의학적으로 설명하면 특정 물질의 과도한 사용으로 내성과 금단 증상이 생긴 상태입니다. 내성은 같은 효과를 보기 위해 더 많은 자극이 필요한 것입니다. 처음에는 설탕 한 스푼에 도파민이 콸콸 나왔는데 시간이 지나면 도파민 양이 줄어듭니다. 이게 내성입니다. 과거 느꼈던 쾌감의 기억은 그대로 남아 있기에 그때의 쾌감을 다시 느끼기 위해 점점 더 많은 설탕을 먹게 되는 것입니다. 금단은 내성의 다른 모습입니다. 같은 효과를 위해 더 많은 자극이 필요한 만큼 그 자극이 없을 때는 몸과 마음이 그 자극을 내놓으라고 으르렁대는 것이죠. 그러니 단것을 폭식하다, 이러면 안된다는 생각에 갑자기 끊었다가, 금단 증상에 또 다시 단것을 폭식하는 패턴을 반복하는 겁니다.

 단것을 끊었더니 안 피우던 담배를 세 갑이나 피우게 되었다고요. 담배의 니코틴으로 설탕 달라 으르렁거리는 뇌를 진정시켰던 셈입니다. 마리화나처럼 약한 마약까지 철저히 관리하는 건 이처럼 점점 더 강한 마약으로 옮겨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설탕과 술, 그리고 담배는 중독성 면에서 보면 허락된 마약인 셈입니다. 건강을 위해 멀리 해야겠지만 쉽지 않습니다. 이런 걸 끼고 산다는 것 자체가 그만큼 인생이 고달프다는 얘기겠죠. 아무리 열심히 살고 성공해도 노화를 피할 길 없고 언젠가는 죽어야 하는 게 우리 인생입니다. 가치 있게 인생을 살려고 노력하는 것과 인생 본질에 짙게 깔려 있는 철학적 허무는 다른 차원입니다. 한 모금의 담배, 한 잔의 술, 그리고 달콤한 음식 없이 맨 정신으로 살기 힘든 게 인생 아닐까요. ‘먹방’(먹는 방송)이 유행인 것도 출연자가 유쾌하게 떠들며 맛있는 음식 먹는 걸 보면서 우리 뇌가 대리 만족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내가 직접 먹지 않았지만 그 영상이 내 기억을 되살려내 마치 내가 먹는 것처럼 도파민을 방출하는 겁니다. 먹방을 보며 지친 뇌를 위로하는 셈입니다.

 자, 다시 설탕 중독으로 가보죠. 설탕 중독에서 벗어나고 싶다고 설탕과 싸워서는 답이 없습니다. 아무리 의지가 강해도 내 본능이 설탕을 원하면 싸움에서 이기기가 쉽지 않습니다. 설탕을 대신해 나를 위로해줄 것을 찾아야 합니다. 그게 뭘까요.

 뇌는 중독성 있는 쾌감 시스템도 있지만 좀 심심한 듯해도 내성 없이 잔잔하게 뇌를 위로하는 시스템도 있습니다. 이를 연민시스템이라 부르기도 하는데요. 이를 활성화하려면 자극적인 것에 반응하는 뇌를 잠시 끄고 잔잔히 내 마음을 바라보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사실 중독은 자극에 몸과 마음이 끊임없이 반응하다 발생하죠. 그래서 반응을 끊는, 차로 치면 기어를 중립으로 놓는 훈련을 하는 겁니다.

 그런 훈련의 하나로 식사 시간을 이용한 마음 충전법을 알려 드리겠습니다. 바쁘게 살다 보면 ‘먹기 위해 먹는’ 식사 시간을 갖기 쉽습니다. 미팅과 미팅 사이에 허겁지겁 식사한다든지, 할 일이 많아 점심 시간에 컴퓨터로 일하면서 식사를 한다든지 말이죠. 이러면 먹으면서도 내가 먹는 걸 의식하지 못하고 내 마음은 다른 일에 집중합니다. 음식을 먹는 게 아니라 삶의 긴장감을 먹는 셈이 돼버립니다.

 이렇게 식사하면 충분히 씹지 않아 소화가 어렵고, 포만감 인식 없이 무의식적으로 먹어 필요 이상의 칼로리를 섭취하게 만들기 쉽습니다. 이게 반복하면 체중도 늘겠죠. 또 소화하느라 너무 많은 에너지를 쓰기에 정작 일할 때 쓸 에너지를 축나게 합니다.

 의식하면서 식사하기(conscious eating)를 권하는 이유입다. 말 그대로 내 입 속에 맴도는 밥 알의 느낌, 음식의 향, 그리고 색 등을 음미하며 식사하는 것입니다. ‘내가 음식 전문가도 아닌데’라고 생각하나요. 맛을 감별하자는 게 아니라 이 단순한 식사 습관이 잠시나마 바쁜 일상에서 나를 분리해 마음을 충전할 수 있습니다. 충전된 마음은 심리적 허기를 줄여 과식과 단것에 대한 탐닉을 줄여줍니다.

 이제 실천 방법입니다. 먼저 조용히 식사할 곳을 찾습니다. 자연과 가깝다면 금상첨화입니다. 일과 관련한 건 주변에 두지 않습니다. 음식은 건강에 좋은 것으로 선택합니다. 그리고 내면의 감각을 일깨웁니다. 먹기 전에 음식 향과 색 등을 느끼는 거죠. 그리고 세 번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내쉬는 호흡을 하며 이완을 한 후 식사를 시작합니다. 천천히 잘 씹으며 그 느낌에 집중합니다. 입 안에 음식이 다 넘어가기 전에 또 음식을 넣지 않고 충분히 느껴봅니다. 한마디로 느린 식사입니다.

 언제 이렇게 먹느냐 싶어 답답한가요. 이 이야기를 듣는 것만으로도 답답하다면 이미 뇌가 너무 전투적으로 켜져 있는 상황입니다. 하루에 잠깐이라도 이런 이완의 시간을 갖는 게 오히려 강한 전투력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과도한 설탕 섭취에서도 벗어날 수 있습니다.

윤대현 서울대병원 강남센터 정신건강의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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