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 사람] 저구마을서 만난 이진우 시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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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하냐고요? 행복하기 위해 가족들과 함께 이곳에 왔어요. 땅끝 마을 외진 곳에서 외롭지 않냐고요? 사람들 틈새에서 통하지 않는 외로움 달래러 여기로 왔어요. 출세도 성공도 바라지 않으니 편안하고 넉넉하네요."

서울에서 오후 2시 40분에 출발, 밤 9시가 넘어서야 거제도 남단 저구마을 이진우(38) 시인 집에 도착해 늦은 저녁과 함께 막걸리 잔을 기울일 수 있었다.

복숭아꽃.살구꽃 한창인 함안.산청 산골짜기 푸릇한 보리밭 자락 보며 왈칵 멈춰 밭이나 갈며 살고 지고 싶은 마음 달래며 달려온 남쪽 끝 바닷가에는 칠흑과 적막 속에 별빛만 쏟아지고 있다.

"모래밭에 앉아 바다를 바라봅니다//해달이 바다를 베고 눕고/어린 자식들은 물장구를 칩니다//멀리서 추억 몇이 헤엄 치고/아내는 모래를 덮고 눕습니다//수시로 흔들던 마음이/모처럼 잔잔합니다//갈매기는 생각을 물어나르고/바닷게는 느릿느릿 시간을 쪼개 먹고 있습니다//모래밭에 앉아 내 마음을 바라봅니다."

이씨가 올초 펴낸 시집 '내 마음의 오후'를 들여다 보는 마음 역시 잔잔하고 느릿해진다. 1989년 등단해 뭐가 그리 바쁜지 시집.소설집.수필집 등 이 글 저 글 가리지 않고 15권이나 펴내며 조바심치던 이씨가 이제 안심(安心)의 경지에 이르렀음을 읽을 수 있었다.

본지에 '저구마을 편지'를 연재하며 가족과 이웃, 그리고 자연과 편안히 어울려 사는 삶이 부러워 이씨를 찾았다.

"눈만 뜨면 쓰고 또 써 3개월 만에 장편소설 한 편을 쓰기도 했습니다. 출판사 일을 하며 마음에 안드는 책을 기획 편집하기도 했습니다. 물론 벌어먹고 살기 위해서였죠. 며칠 밤을 새우며 술을 마시기도 했습니다. 그런 내가 미웠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 서울의 삶을 둘러보니 사랑하는 가족을 위한 시간은 없고 내 자신만 피폐해져 가더군요."

그래서 이씨는 2000년 초여름 서울의 삶을 접고 이곳으로 내려왔다. 이삿짐을 싸면서, 심야고속버스를 타고 오면서 아내는 울었다. 서울 친정 식구들 떠나 유배가듯 내려온 길이었으니 젊은 아내에게 어찌 눈물이 없었겠는가. 이곳에 내려와서도 생계를 위해 글에 매달리려는 이씨를 아내가 만류했다.

"피 말리며 창작에만 몰두하는 남편을 바라보기가 안쓰러웠어요. 식구끼리 행복하기 위해 이곳에 왔으니 글만 전업하지 말고 우리와 산책도, 밭일도 좀더 오래 함께 하자고 했습니다."

남편의 글 대신 아내가 면사무소에서의 아르바이트로, 또 남는 방 5개로 민박도 치며 생계를 해결하자고 했다. 그런 아내의 제안에 따르니 만사가 태평하고 비로소 쓰고 싶은 글감도 자연스레 떠오르더라는 것이다.

"아내의 말을 듣고 보니 '그래 난 참 잘못 살아왔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뭣 때문에 내가 글을 쓰고 일해왔던가. 그런데도 정작 가족과의 살가운 정에는 지극히 소홀하지 않았던가' 하고요. 이제 쓰고 싶은 글만 쓰며 아내와 아이들과 함께 텃밭과 바닷밭에 나가 채소도 가꾸고 조개도 줍습니다. "

30~50대의 장.중년이면 사회와 위아래 세대를 떠받치는 중견이다. 맡고 있는 일에서 쉽사리 떠날 수 없다. '무엇을 섬기고 떠받들려 일에만 중독돼 살았던가'라는 회한에 새벽 닭 울고 저구 앞바다가 희붐하게 밝아온다.

막걸리가 동나 마을의 조그만 주조장을 찾으니 술익는 냄새 진동하는데 주인은 벌써 밭에 나가고 없다. 집 앞 텃밭에 노랗게 핀 배추꽃을 이씨는 자랑스레 보여준다. 종묘상에서 산 소출좋은 씨앗이 아니라 이 씨앗을 받아 토종 배추밭을 가꾸겠다며 쇠스랑 등 농사 연장을 챙긴다.

"중앙일보의 '저구마을 편지'를 보고 주말이면 몇 팀씩 찾아와 물어요. 행복이 무어냐고. 해 저물녘 밭에서 돌아와 연장을 씻는 마음, 자연과 이웃과 틈없이 함께 하고 있다는 마음이 행복 아니겠어요. 무엇이 되어야겠다며 경쟁하는 삶이 아니라 비우고 더불어 살면 그것이 행복 아니겠어요."

거제도 저구=이경철 문화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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